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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경무 시인 / 돌배나무 아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3.

류경무 시인 / 돌배나무 아래

 

 

  찬바람 불던 그 여름

  내겐 모든 것이 과분했던 남반구에 큰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돌배나무 아래 누워 있나 하긴, 어슴푸레 생각날 듯도 하다

  그러니까 이 나무 아래 누운 저녁에는

  나는 전 생애를 걸고 냉장고처럼 밤새워 노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돌배나무,

  떨어지는 돌배에 이마를 내어주며

  어떤 세기는 꽤 익숙했으나

  어떤 세기는 몹시 위험했으므로 넘어가기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곧, 당분간, 잠시라면, 견디겠다 여기서 노래하며 견디겠다

  흔들리는 돌배나무 아래

  나는 지금

  밤을 꼭 지새고 말겠다는 어떤 작정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그 눈빛들과 싸우는 중이다

 

  마치 제가 내 입이라도 되는 양

  모든 나무들이 나를 대신해 노래하고 있다

 

계간 『애지』 2012년 여름호 발표

 

 


 

 

류경무 시인 / 내력(來歷)

 

 

  1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상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냄새의 영역이든

  자기장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나는 오래 전에 그것들로부터 도망쳐 왔다

  절인 고기라든지 광주리에 담긴 꽃게로부터 당도를 모르는 소금과 유향으로부터

 

  2

 

  누군가 나를 밀어냈듯 전혀 새로운 냄새가 나를 당겼다

  그들은 북쪽 루트를 따라 내려왔다

  애초에 우리가 계산법을 몰랐듯

  증명되지 않는 출생도 있다 기억난다,

  그 저녁의 한 때 아무다리야 강가에 다다른 그들이 내게 일러주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냄새에 대해서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어떤 꼴림과 끝도 없는 아리아,

  더 이상 다루기 힘든 냄새에 대해서

 

  3  

 

  우리는 너무 많은 길을 걸었다

  모래언덕에 길게 누운 한 상인이 내게 말했다

 

  너는 원래 사람이 아니었다 밤이면 눈 덮인 산꼭대기에 올라 하초를 드러냈었지

  생의 끝장을 아는 듯 사막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다가

  짐승을 만나면 마구 올라타곤 했지 그랬었지

 

  참 좋았겠다 냄새만으로 그걸 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니 꽃들아 검둥이들아

 

  4

 

  날인하지 말아야 할 문서도 있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상업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걸어야 할 길은 없다 중요한 건

 

  저기 모래언덕 위에 뜬 별

  그중에서 처음으로 반짝이는 별

  저 곳에서 정말 필요한 게 뭘까 뭘 팔아야 될까 쯤의 궁리 정도

 

계간 『시와 미학』 2012년 여름호 발표

 

 


 

류경무(柳景茂) 시인

부산 동래에서 출생. 1999년 《시와 반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