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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향란 시인 / 물의 해부학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3.

이향란 시인 / 물의 해부학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 이후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다

 

  수소와 산소, 있지만 없다 없지만 있다

  손을 넣어 놀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쏟아 부어도

  물위 그 어떤 무늬도 건져낼 수 없을 만큼

  적시며 흐르며 물은 버틴다

  맑은 힘, 그에 대해서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 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계간 『애지』 2010년 겨울호 발표

 

 


 

 

이향란 시인 / 공중, 전화를 찾다

 

 

  혼자서 아침을 부르고 혼자서 저녁 속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한꺼번에 공중이 그리운 날

  길모퉁이 부스에 들어가 전화를 걸면

  저요 저요, 손을 들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거나

  노래를 부르겠다거나 술을 같이 마시겠다거나

  연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들이 범벅을 이룰 것 같다

 

  거리로 뛰쳐나가 ‘여보세요’ 하면

  공중은 꽃밭처럼, 숲처럼, 새떼처럼 몰려와

  오래도록 막혔던 귓속을 뻥! 뚫어 줄 것 같다

 

  하여 나는 곰살궂은 일상에 몸을 띄우고

  공중의 몸으로 떠들썩하게 날아다니거나

  공중의 눈빛을 반짝이며 공중의 가슴으로 화끈거릴 듯싶다

  그들처럼

 

  적요로 인한 환청에도 시달리지 않을 듯한데

 

  공중, 전화는 어디에 있을까

 

월간 『현대시학』  2011년 9월호 발표

 

 


 

이향란 시인

1962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1993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개詩』, 『슬픔의 속도』가 있음. 2009년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