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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희 시인 / 완강한, 몸
십일 년 된 묘를 개장하기로 한다 헐벗은 봉분을 연다
흙을 물고 쓰러지는, 그물 같은 뿌리들 검고 축축한 집…… 그 속에서 한 점 한 점 벗어버리려 애쓰는 아버지
물로 풀어져 눈알이 흘러간다 풀로 솟아난 손가락이 허공의 급소를 더듬는다 벌레로 기어다니는 내장, 꿈틀꿈틀 곰팡이 슨 채로 거의 육탈이 안 된 다리 한 짝 걸어가야 할 많은 길들이 남아 있었다는 걸까
짓는 데 십수 년 그때 이룬 몸을 아직 허물지 못한 아버지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이처럼 풀 죽은 모습이다 어떤 간섭도 싫다는 듯 저 혼자 생성되고 무화하는 완강한, 몸
아버지가 남긴 몸을 이끌고 나는 덜그럭거리며 하산한다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산등성이 부근 진달래가 발진처럼 돋아나 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 중에서
박설희 시인 / 접시
오늘은 경사진 하루였지 자꾸 미끄러지는데 거머쥘 것이 없었어 나뭇잎은 떨어지고 이마에 핏줄이 섰어 어쩌자고 새는 내 정수리에 앉아서 계속 쪼아대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난 십 년째 실종 중이라네
나, 이 평발은 유전이네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숱한 마음을 밟고 꿈 속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기우뚱거렸지 그럴수록 뚜벅뚜벅, 땅에 기대고 살았던 조상들과 평생 공사판을 전전했던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그러했을까 뚜벅뚜벅, 발을 땅에 밀착시키고 그 단단함과 하나가 되지
발에 새겨진 유전의 흔적은 나를 쉽게 지치게 해 힘줄이 당기고 중심이 흔들리고…… 젖지 않으려 에돌아 간 모래언덕에선 발이 푹푹 빠지고, 난 결국 바닷가에 이르렀지 낙지 한 접시 시켜놓고 토막 난 다리와 몸통을 뒤적여 보는 중인데,
목포 앞바다, 그물에 매달려 올라오네, 낙지가, 수천 년 된 고색창연한 접시를, 제 몸집보다 훨씬 큰 접시의 문양을, 제 몸에 새길 듯이, 꽉 움켜쥐고, 올라오네, 의기양양하게 눈알을 굴리며 머리를 내두르며, 들어올리네, 접시를,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을,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몇 만 개의 눈동자를, 번쩍,
나도 덩달아 다리에 불끈 힘이 들어가 발을 쾅쾅 굴러 보았지 뼈를 타고 올라오는 단단한 반동이 기분 좋더군 이윽고 서류에 도장 찍듯 나는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지 다시는 미끄러지지 않을 것처럼 땅의 흔적을 다 몸에 새길 것처럼
계간 『불교문예』 2008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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