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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정산 시인 / 종이컵에 대한 종이컵을 위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4.

황정산 시인 / 종이컵에 대한 종이컵을 위한

 

 

  종이컵이 좋다

  환경을 사랑하는 그대들이 싫어할 이야기지만

  오늘도 종이컵을 집어든다

  이름이 없어 좋다

  고뿌도 그라스도 아니고 잔이라 부를 수도 없는

  그래서 뭐든 담을 수 있어

  좋다

  그대들은 혹여

  담배꽁초나 타액이 들어 있는 와인잔을

  맨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그런 것들마저 허락하는 모습을 떠 올릴 수 있는 것은

  단지 종이컵뿐이다

  때로

  버리는 사람들에게 0.001ppm의 독성으로 저항하는

  자존심을 잃지 않기도 하지만

  아무렇게나 물 위에 떠 흘러가고

  불속에 던져져 오직 한 순간 환하게 타오르는

  종이컵이

  나는 아니 나라면 아니 내가

  좋다

 

반년간 『두레문학』 2010년 하반기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사라진다

 

 

없어진 한 짝 양말에 관한 말은 아닌

꿈속에서도 마주칠 수 없는

모래 냄새가 나는 말이긴 하나

 

제 꼬리를 삼키며 숨는

뱀의 이름 같기도 한

그러나 모든 구멍들을 채울 수 없을 때

하는 말이기도 한

 

연을 날리다 하늘을 본 사람들은 아는 말이지만

알을 낳는 새에 대한 말은 아닌

 

둔중한 것들이 용적을 비우고

차지하는 것들이 바람에 실리고

불리웠던 것들이 이름을 감추고

 

사라진다

그렇게 살아진다

 

격월간 『유심』 2011년 3~4월호 발표

 

 


 

황정산(黃貞産) 시인

1958년 목포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및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1년 《현대시문학》으로 시창작 활동 시작. 저서로는 『작가론 김수영 총서』(2003) 등이 있음. 현재 대전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월간 『우리詩』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