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수진 시인 / 낙엽을 버티는 힘
가랑비 몇 방울에도 못 이기는 척 떨어지는 낙엽이 있다 잎맥 끝자락부터 제 몸을 뉘여놓는, 허나 누군가의 어깨 위로 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낙엽과 낙엽 사이 그 허공의 힘으로 눕는다
평생, 서로의 등짝만 보고 살아간다는 일
밤이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견뎌야 한다 아래층 여자는 나의 등을 나는 윗집 남자의 등을, 밀어야 한다 그 등짝에서 박차고 나왔던 식탁이 보이고 뺨 위로 스친 손바닥이 보이고 내지 못한 이력서들이 가득 찬 책상이 보이지 누군가 이 천장을 밀고 우리의 등짝을 받치고 있다는 것, 한 평 남짓한 방이 밀어주는 힘으로 쌓여가는 우리들, 허공들,
몇 가지 음식 나누어 주러 들른 옆집 벽 뒤로 낙엽들이 조금씩, 들썩이고 있다 어떤 사내가 밟아 깨우기 전까지 그들은 제 뒤를 못 본 채 꿈을 꿀 것이다
매일 누군가의 등짝을 밀면서도 우리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를 몰랐던 것처럼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08) 발표
방수진 시인 / 내몽고, 기록수첩
바람이 긁고 간 무늬를 쫓아 이곳까지 왔다 멀리서 유목민의 밥 짓는 연기, 말들의 몰아세우는 입김들이 층층이 겹을 쌓아 그대들 집 만드는 곳 집시의 눈 깜박임에 날은 저물고 횃불의 행로를 따라 풀이 드러눕는다
내일은 돌아올까요
튀밥 튀어 오르듯 자주 별똥별이 떨어져 내려 그대들 눈 속에 박혔을까 모닥불 사이로 던져주는 한 주먹의 잿밥도 서러운지 종종 눈물이 맺혔다 쿵 떨어졌다
짙은 구름이 줄지어 길을 떠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열병에 시달렸다 떼 지어 몰려오는 양처럼 무섭게 반점이 돋아나고 100년간의 가뭄같이 온몸이 쩍쩍 벌어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꿈속에서, 간혹 집시 여인의 곡소리가 귀에 들렸지
이곳은 건너오는 노을마저 땅 밑으로 가라앉힌다 모래 짙은 바람이 닿았던 곳마다 수십 개의 멍구빠오 1) 가 세워지고 또 허물어질 것이다 집시 여인의 검은 눈동자에서 밤은 왔다가 가고 이따금, 돌아오지 않는 그대들을 향해서 피우는 향들이 고개를 넘어 곳곳으로 신열처럼 흩어진다
1) 내몽고인들의 전통적 주거형태. 텐트식이라 손쉽게 짓고 허물 수 있어 이동하기 편리하다
계간 『시인시각』 2009년 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선영 시인 / 조로(早老)의 화몽(花夢) 외 1편 (0) | 2019.09.24 |
|---|---|
| 유안진 시인 / 다보탑을 줍다 외 1편 (0) | 2019.09.24 |
| 황정산 시인 / 종이컵에 대한 종이컵을 위한 외 1편 (0) | 2019.09.24 |
| 박설희 시인 / 완강한, 몸 외 1편 (0) | 2019.09.24 |
| 신영배 시인 / 방과 어항 (0) | 2019.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