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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경호 시인 / 나무의 정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5.

강경호 시인 / 나무의 정신

 

 

  죽은 나무일지라도

  천년을 사는 고사목처럼

  나무는 눕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서재의 책들은

  나무였을 적의 기억으로

  제각기 이름 하나씩 갖고

  책꽂이에 서 있다.

 

  누렇게 변한 책 속에

  압축된 누군가의 일생을

  나는 좀처럼 갉아 먹는다.

  나무는 죽어서도

  이처럼 사색을 한다.

 

  숲이 무성한 내 서재에서는

  오래 전의 바람소리, 새소리 들린다.

 

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천년의시작, 2004) 중에서

 

 


 

 

강경호 시인 / 비둘기

 

 

  사무실 입구에

  가끔 취객이 오물을 게워내면

  늘 그 자리에 내려와 주워먹고

  햇빛 속으로 날아가버리는 새가 있다

 

  지하 단란주점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사연이었을지

  가슴 찢는 실연의 상처였을지는 모르지만

  눈물 찔끔거리며 게워냈을 슬픔을

  먹어치운 새를 생각하며

  아직 물기젖은 빈 자리를 바라본다

 

  지금껏 병문안을 가고

  망자의 영정앞에 국화꽃을 바치면서도

  참을 수 없어 왈칵, 토해냈을 밥알모양의 슬픔을

  비켜가고 싶은 내 앞에,

 

  어둠 속으로 날아와

  낯선 누군가의 슬픔을 먹어치운

  한 떼의 은빛 하느님이

  실루엣 눈부신 아침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다.

 

계간 『서정시학』 2010년 겨울호 발표

 

 


 

강경호 시인

전남 함평에서 출생.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1996년 계간《시와사람》을 창간. 저서로는 시집으로 『언제나 그리운 메아리』, 『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 『함부로 성호를 긋다』, 『휘파람을 부는 개』와 연구서로는 『최석두 시 연구』, 문학평론집 『휴머니즘 구현의 미학』,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와 기행에세이집 『다시, 화순에 가고 싶다』가 있음. 현재 계간《시와사람》 발행인 겸 주간이며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시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