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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시인 / 솔레파
내 쓰레빠의 궤적이 언제부턴가, 내 생의 그것이다 기울어진 전봇대가 노래한다 쓰레빠가 찍은 왼발자국은 허공의 턱수염을 쓰다듬고 오른 발자국은 전봇대를 타고 오르다가 슬쩍 늘어진 현수선을 넘는다 솔레파, 노래를 따라가다 문 연 화장실에 한 남자가 누워있다 참 시체스럽다, 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벌떡 일어난다 그가 내 노래를 신고 있다 생의 자장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늘어진 자세, 다른 신발은 아무렇게 벗어놓지만 쓰레빠 만은 신발장 높은 곳에 고이 모셔놓는다 노래를 보면 모두 신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니, 분명 태초의 역사를 가진 본능이지만 곰팡이 낀 신발장의 높이만 가져도 생의 현수선은 공유하지 못한다 몸 어디건 거기가 제일 끝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엇과도 화해하는 자세를 만들면 중력장 안에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다 죽음과 최소시간 경로, 그 비가역의 경로가 낮게 깔린 구름발치서 웅얼거린다 노래가 나를 신고 다닌다 솔레파
월간 『현대문학』 2012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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