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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유라 시인 / 카페에서 책읽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8.

박유라 시인 / 카페에서 책읽기

 

 

  카페「블루」에서 흘러내리는 바코드 길게,

  장맛비가 내린다

  출렁이는 수평선에 빨대를 꽂고

  책을 읽는 밤

 

  어디선가 삐걱이는 문, 바람에 쓸리는 파도

  그런 것들로 내가 지쳐 잠든 사이

  ㅡ나는 혹시 물고기가 꾸는 꿈이 아닌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카피되는 카페

  우울한 음악이 흐르는 저 바다 멀리

  바디바바디바(-D-/-D-)혈액형 의 산모가

  꿈을 꾸고 있다 꿈은 꿈에 잇닿아 있고

  어쩌면 음악파일 ‘Ocean Blue'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는 저 음악을 듣겠지

  바다에 나가 흘러오고 흘러가는 밤을 오래 바라보겠지

 

  빨대에서 흘러내리는 시큼한 맛의 바다

  오렌지 빛 동이 터온다

  오늘은 어제 마시다 남은 음료 같은 것일까

  ㅡ낡고 얼룩진 필사본을 버리고나는 이제

  ㅡ저 뜨겁고 비린내 나는 바다에서

  ㅡ바코드 한 장 뽑아들고 어디로든 문 밖으로 가야 할 텐데

  ㅡ가ㅡ야ㅡ할ㅡ텐ㅡ데ㅡ

 

* 바디바바디바(-D-/-D-)혈액형: Rh혈액형은 항원 C,D,E가 있다. 이 가운데 항원 D가 없으면 Rh음성, 있으면 Rh양성이다. 바디바바디바는 D는 있지만 일반인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C,E가 없는 혈액형이다.

** 라마 규르미의 티벳 음악 앨범 리뷰에서 이미지 차용

 

월간 『현대시』 2005년 4월호 발표

 

 


 

 

박유라 시인 / 공원으로 가는 저녁

 

 

  그늘이 수북히 쌓인다

  허공에도 껍질이 있는지

  바람이 그것들을 자꾸 벗겨내는 모양이다

 

  문득 둥근 저녁의 그늘로 휘청 들어서고 말아

  돌아보면 저쪽 세상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다

  목소리는 공기층과 층을 떠돌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오랜 슬픔 같은 것’

  집이 한 채 붙박혀 있다

  쉼 없이 문을 두드리는 시계바늘

  둥근 저녁의 나무문에

  금갔다

  문을 두드리는 시각과 시각 ‘똑’에서 ‘딱’으로 가는

  사이에 검은 망토를 끌며 달아나는 강도들

  사이에 몇 사람인가는 죽고

  사이에 노래방에서는 십팔번을 바꾸려고

  나는 열심히 새 노래를 익힐 것이다

  익힐 것이다 오, 긴긴 날

  오븐에서 익어가던 해 한 덩이

  피가 배어나올 듯 선연하다

  (저녁밥을 먹고 나는 공기를 맑게 씻어 엎어둔다)

  무수한 층위의 깨진 유리담장 너머로 달아나는 시각들

  검은 망토를 끌며 달아나는 강도들

  먼 산에 무덤들 쌓이는 저녁

 

계간 『생각과 느낌』 2005년 여름호 발표

 

 


 

박유라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87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야간병동』, 『갈릴레이를 생각하며』, 『푸른 책』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