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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명선 시인 / 오후를 견디는 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9.

오명선 시인 / 오후를 견디는 법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11년 여름호 발표

 

 


 

 

오명선 시인 / 얼음의 시간

 

 

  과녁을 그리던 수심이 묶여있다

 

  수면을 꽉 깨문 구름의 어금니들

  밑줄 그어놓은 물의 잔뼈들이 이렇게 견고하다니,

  

  지금은 얼음의 시간

  잔물결이 맨발로 견뎌야 할 저 강은

  등돌린 밤이다

  

  톱날로 베어지는 물도 있어

  계절은 제 그림자 속에 가둬둔 울음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

  

  저것은 침묵의 두께

  내 무릎관절이 수천 번을 더 오르내려야 할

  미완의 경전이다

  

  앙다문 물의 입술

  굳어버린 물의 표정은 싸늘하다

 

월간 『현대시학』 2012년 7월호 발표

 

 


 

오명선 시인

1965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후를 견디는 법』(한국문연, 201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