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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을 시인 / 북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30.

이가을 시인 / 북소리

 

 

  죽은 소들의 넋을 위로한다기에

  가 본 금강 어젯밤 현몽했던 왕버드나무가

  날아오를듯한 색색 무복으로 벌이는

  지노귀굿이 한창이었습니다

  바람이 울리고 가는 징소리

  죽은 소의 가죽 덮어 쓴 북소리에서 나는 소리가

  어찌 소의 울음뿐이라고 하겠습니까

  커다란 소의 눈알 부릅 눈 뜬 돌멩이들

  웅성거렸지요

  코뚜레 벗은 소의 혼백들 속에 사람들

  발에 밟혀가며 밀려갔지요

  검은 연기 풀풀 내보내고 마을의 굴뚝 위로

  올려다 본 하늘대웅전

  붉은 저녁해 엎드린 천년 기도였을까요

  가슴을 턱 막았던 울혈덩어리 빠져나오던 걸요

  닫혔던 자궁이 길을 열고 몽글몽글 붉은 피

  선운사 동백처럼 피어났습니다

  왕버드나무 요령소리에 붙들려나왔던 소들

  북소리 만드는 공방 마당을 지나

  좁은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식을 치루듯 공방 안을 한 바퀴 돌고

  평상에 쌓인 가죽 더미에 더운 김 뱉었지요

  무릎꺾고 꿈벅거리던 큰 눈을 감더니 이내 업드렸습니다

  소의 등 길게 쓰다듬는 직공의 손

  비틀린 관절을 풀어가는 소리 들립니다

  하늘대웅전을 향한 천년 기도

  한층 깊어진 북소리입니다

 

월간 『현대시학』 2008년 7월호 발표

 

 


 

 

이가을 시인 / 냄새의 무반주

 

 

  새싹들 올라오는 봄의 월요일 바흐의 무반주를 듣는 숲의 아침에

  초록이 짙은 냄새의 음계는 파이거나 솔이다

 

  숲의 음악과 냄새는 동의어가 되었다

  냄새의 군락지 숲은 언제 나무들의 학교가 되었나

 

  사방 십리 갓 떠오른 냄새들의

  출결이 나무의 출석부에 기록되었다

 

  솔솔 풀려나간 이름들 바람패에 감아

  구름실 촘촘히 박은 초록무늬로 시침하였다

 

  홍역의 초록발진은 반항기 나무들의 표식이 되었다

  바람이 데리고 온 풀잎은 휘트먼의 것

 

  이름도 없이 표지엔 초록이 바탕이다

  자연을 사랑한 그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푸른 봄의 둥근 기억을 과도로 깎아간다

  껍질의 얇은 표피를 벗겨갈 수록 과즙은 흡수된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냄새의 내력을 들킨다

  칸칸마다 봄눈 녹는 얼음의 서랍 당신의 얼굴이 녹고있다

 

  바흐의 무반주가 봄과 겨울 사이 경계를 흐른다

  숲에는 발을 위한 별들의 무반주

 

  바람불어와 가갸 거겨 읽는 음률이 즐겁다 봄의 금요일

  숲의 간이역 푸른 탁자는 당신의 것

 

월간 『HIM』 2012년 8월호 발표

 

 


 

이가을 시인

경기 남양주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졸업.1998년《현대시학》에 <못 박는 집> 외 9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봄, 똥을 누다』(한국문연, 2000)와 『저기, 꽃이 걸어간다』(동학사, 2004)가 있음. 1999년 문예진흥원 작가기금 수혜. 2004년 문예진흥원 작가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