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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모순의 흙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2.

오세영 시인 / 모순의 흙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

 

시집 『 모순의 흙 』(고려원, 1987) 중에서

 

 


 

 

오세영 시인 / 열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입에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집 『어리석은 헤겔』(고려원, 1994) 중에서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충남대학교(1974~1981)와 단국대학교(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