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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황금을 찾아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2.

최금진 시인 / 황금을 찾아서

 

 

  은율, 재령,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엘도라도를 생각하면

  우리집 마당도 금 뿌리 가득한 어느 만석꾼의 밭인 것만 같다

  그러면 식탁에 달랑 올라온 김치와 밥으로 때우는 저녁상도

  푸짐한 금빛으로 넘치고

  내 이름의 ‘金’자도 왠지 거부(巨富)의 돌림자 같기만 하고

  설핏 든 잠은 스페인 사람들이 믿었던 엘도라도로의 통로라는 생각

  어쩌면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허물어진 방바닥 귀퉁이를

  숟가락으로 파볼 일인지도 모르는

  어젯밤 뜬금없는 누런 똥꿈을 자꾸 왕관처럼 머리에 썼다가 벗으며

  할아버지 화장터에서 주워온 금이빨을 고모는 어디에다 썼을까 하는 생각

  금반지 한 돈 물려받지 못한 처지를 비관으로 몰고 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파보는 누리끼리 낡고 오래된 금에 대한 몽상

  나에게도 금광이 있으면 좋겠다

  금지옥엽 길러서 금의환향하는 자식 생각과

  적어도 금전 걱정은 없어야겠다는 새해의 새로운 각오를 파묻어  둘

  토요일마다 로또방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좋을

  은율, 재령,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엘도라도

  감나무에 걸리는 햇살, 그 아래로 사금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

  벽에다 똥칠을 해놓고, 이게 다 금이다, 넋을 놓아버린

  할머니는 행복한 연금술사

  일생에서 한번만 더 길몽을 만난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노름이나 배울까

  금값이 올랐다는 뉴스를 보면 억울하고 또 반갑다

  내일은 토요일, 복권은 여덟시까지 팔고, 일주일은 그렇게 그냥 가고

  저녁별들은 황금빛을 쩔렁거리며 빛난다

 

 시집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중에서

 

 


 

 

최금진 시인 / 아파트가 운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치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는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시집 『새들의 역사』(창비, 2007) 중에서

 

 


 

최금진 시인

1970년 충북 제천에서출생.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1년 제1회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창비, 2007)와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