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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시인 / 우듬지
나무 밑동을 안았는데 왜 우듬지가 먼저 기척을 하는지
언젠가 당신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내게도 흔들리는 우듬지가 있음을 알았다
빠른 속도로 번지는 노을, 그 흥건한 물에 한 철 밥 말아먹었다 너무 뜨겁거나 매웠지만
상처라도 좋아라 물집 터져 나온 진물에서 박하냄새 맡던 저녁, 내 속으로 한 함지 되새 떼 쏟아져 날았다
손닿지 않는 곳에 뭘 두었니? 당신을 숨긴 우듬지엔 만질 수 없는 새소리만 남아,
어느덧 말라버린 무화과꼭지처럼, 살이 쏙 내린 잔뼈로 이름만 얽어놓은 그곳, 닿을 수 없는
시집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중에서
이규리 시인 / 결혼식
하얀 드레스 자락이 조마조마 먼지를 끌고 간다 구두 안에 옹크린 발등도 꼼지락거리겠다
신부, 먼데서 온 신부 먼지보다 더 작게 웃을락 말락 소름 돋은 팔이 가늘고 착잡하다
하얗게 펼쳐놓은 길, 꿈길 슬쩍 당기면 헝클어질 광목 깔개가 문득 실크로드 같다
천 년 전 사막을 횡단하던 대상들, 오늘 정장으로 모여 삼삼오오 술렁이는데
저 행진 끝이 나면 인연은 무엇을 흥정할 것인가
일생이 서로 건네고 받아야 할 교역이라는 듯 지금, 꽉 끼는 구두 참으며 간다
불빛 아래 보송보송한 먼지, 축가 날리는 속으로 인조 속눈썹 깜빡이며 어린 낙타는 간다
월간 『현대시학』 2007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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