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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우듬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3.

이규리 시인 / 우듬지

 

 

  나무 밑동을 안았는데 왜 우듬지가 먼저 기척을 하는지

 

  언젠가 당신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내게도 흔들리는 우듬지가 있음을 알았다

 

  빠른 속도로 번지는 노을, 그 흥건한 물에 한 철 밥 말아먹었다

  너무 뜨겁거나 매웠지만

 

  상처라도 좋아라 물집 터져 나온 진물에서 박하냄새 맡던 저녁,

  내 속으로 한 함지 되새 떼 쏟아져 날았다

 

  손닿지 않는 곳에 뭘 두었니? 당신을 숨긴 우듬지엔 만질 수 없는 새소리만 남아,

 

  어느덧 말라버린 무화과꼭지처럼, 살이 쏙 내린 잔뼈로 이름만 얽어놓은 그곳,

  닿을 수 없는

 

시집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중에서

 

 


 

 

이규리 시인 / 결혼식

 

 

  하얀 드레스 자락이 조마조마 먼지를 끌고 간다

  구두 안에 옹크린 발등도 꼼지락거리겠다

 

  신부, 먼데서 온 신부

  먼지보다 더 작게 웃을락 말락

  소름 돋은 팔이 가늘고 착잡하다

 

  하얗게 펼쳐놓은 길, 꿈길

  슬쩍 당기면 헝클어질 광목 깔개가

  문득 실크로드 같다

 

  천 년 전 사막을 횡단하던 대상들,

  오늘 정장으로 모여 삼삼오오 술렁이는데

 

  저 행진 끝이 나면

  인연은 무엇을 흥정할 것인가

 

  일생이 서로 건네고 받아야 할 교역이라는 듯

  지금, 꽉 끼는 구두 참으며 간다

 

  불빛 아래 보송보송한 먼지, 축가 날리는 속으로

  인조 속눈썹 깜빡이며 어린 낙타는 간다

 

월간 『현대시학』 2007년 6월호 발표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