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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위선환 시인 / 새떼를 베끼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3.

위선환 시인 / 새떼를 베끼다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개깃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공중이다, 라고 쓴다.

 

시집 『새떼를 베끼다』(문학과지성사, 2007) 중에서

 

 


 

 

위선환 시인 / 폭설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째 풍경 속에서는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를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눈 뜨고 처음 내다본 앞바다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는 둘째 풍경 속에서는 야윈 손이 반음씩 낮은 음을 짚어가는 저녁 무렵에 어둑하게 어스름이 깔리는 音調를 새들은 어둔 하늘로 날고 살 속에서는 신열을 앓는 뼈가 사뭇 떠는 오한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잠깐씩 돌아다본 들판에 돌아다볼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는 셋째 풍경 속에서는 눈꺼풀에 점점이 점 찍힌 점무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반점들의 하염없는 나부낌을 아득하게 깊어진 눈구멍 속에서 속날개를 털며 자잘하게 날갯짓도 하는 설렘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물굽이와 들판과 나를 덮고 묻는 눈발이 자욱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풍경 속에서는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는 저것이

 

폭설인 것을

 

내리 꽂고 혹은 치솟는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물고기들끼리 부딪쳐서 산산조각 나는 것 또한

 

폭설인 것을

 

따로 이름 지어 부르지 않았다. 깜깜하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누구인가 그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월간 『현대시학』 2009년 4월호 발표

 

 


 

위선환 시인

1941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출생. 2001년 월간 《현대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한국문연, 2001) 과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한국문연, 2003) 『새떼를 베끼다』(문학과지성사, 2007)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