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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시인 / 조로(早老)의 화몽(花夢)
"엇젼지 눈물이 흘늠니다그려. 당신들을 대하매 내가 꽃을 피엿든 때를 회억(回憶)하여지는구려" 망양초(望洋草)는 백장미와 홍장미를 갓가히 안 치고 그가 젊엇슬 때에 담홍색의 꼿을 피엿슬 때 한 옛적의 니약이를 시작하려 한다. - 김탄실 수필「조로(早老)의 화몽(花夢)」에서
미안하지만, 백장미 홍장미여 나는 날마다 새로 피는 꽃이다 나는 지는 꽃이 아니요 떨어지는 꽃잎도 모른다 누군가 시든 꽃잎을 허옇게 빼물며 나에게 물었다 날마다 다른 빛깔 때론 다른 모양의 꽃잎을 다는 게 귀찮지 않으냐고 그저 웃었을 뿐이지만 나에겐 그 하룻동안이면 끝자락이 처지는 한철이다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나는 벌써 나를 새로 그리고 싶어진다 나는 무언가 늘 모자라고 어딘가 늘 고칠 데가 있는 것이다 알아챘는가, 나는 날이 새면 종이에 다시 그려지는 종이꽃이다 나는 늙는 게 싫어서 종이에게 내 영혼을 팔았다 나는 종이 위에서 날마 다 조금씩 색깔과 모양을 바꾸며 언제까지나 젊고 새로울 것이다 나는 늙지 않고 진행중인, 젊음을 향해 수정중인 꽃이다 백장미 홍장미여, 담홍의 추억도 나는 종이에다 말리련다 멀찌가니 저쯤에 날아가지 않는 남호접 한마리를 그려 넣어다오
시집 『일찍 늙으매 꽃꿈』(창작과비평사, 2003) 중에서
이선영 시인 / 오, 가엾은 비눗갑들
비눗갑 속에 담긴 문드러진 비누의 몰골을 볼 때면 지금 그 비눗갑이 느끼고 있을 슬픔을 알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대부분의 새 비눗갑들에 처음 얹혀지는 비누는 탄탄한 비누여서 보기에 따라서는 비누가 비눗갑 안에 담긴 것이 아니라 비눗갑의 숨통을 누르고 앉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마치 몸에 잘 맞는 아내를 얻은 듯 그때 비눗갑은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가? 그러나 뭇사람의 손때가 묻고 물만 닿아도 녹아나는 비눗갑이 일찍이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비누의 허약한 체질은 얼마나 비눗갑을 놀라게 하고 실망에 빠지게 했을 것인가? 나날이 작아지는 비누들 나날이 풀어지는 관념의 물컹한 살집들 오, 가엾은 비눗갑들이여, 그들은 비누에 대해 얼마나 순진한 기대와 어리석은 집념을 품고 있었던가? 한 개의 비누만을 담았던 비눗갑이란 이 세상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러, 젊거나 어린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망가지는 비눗갑은 유감스럽지만 흙 속 깊이 버려지곤 한다
경험이 많은 비눗갑들이여, 온갖 비누치레에 닳아빠지고 몸을 더럽힌 그럼에도 오래 건재하는 비눗갑들이여, 그때쯤이면 평안할 수 있는 건지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세계사, 199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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