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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행숙 시인 / 해변의 얼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5.

김행숙 시인 / 해변의 얼굴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빠진 게 있을 거야.

 

  코로부터 넘친 코, 코에서 코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면 결국 코가 없고

  귀로부터 넘친 귀, 귀에서 귀까지 귀를 막고 뛰어가면 세상은 온통 귓속 같고

  입을 꽉 다물면 이빨은 자라지 않고, 편도선은 부풀지 않는가. 거품은 일지 않는가.

 

  사진 속의 파도처럼 내 혀는 꼬부라져 있네.

  얼굴을 침실처럼 꾸미고, 커튼을 내리고, 나는 혀를 달래서 눕히네. 나는 사탕 같은 어둠을 깔고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남아도는 게 있을 거야.

 

  여관 여주인처럼 자다 깨어, 자다… 열쇠를 건네네.

  빈방 같은 눈동자

  소파 같은 입술

  그리고 샤워기 밑에서 50분 동안 비 맞고 서서

 

  얼굴로부터 넘치는 저 얼굴,

  닮은 얼굴을 하고 비를 피하네.

 

  얼굴을 차양같이 꾸미고

  그리고 오늘은 얼굴을 베란다같이, 해변같이, 모래알같이 꾸미고

 

시집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 중에서

 

 


 

 

김행숙 시인 / 목의 위치

 

 

기이하지 않습니까. 머리의 위치 또한.

 

목을 구부려 인사를 합니다. 목을 한껏 젖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인사를 한 후 곧장 밤하늘이나 천장을 향했다면, 그것은 목의 한 가지 동선을 보여줄 뿐, 그리고 또 한 번 내 마음이 내 마음을 구슬려 목의 자취를 뒤쫓았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서 황급히 옷을 주워 입듯이.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면 목은 어느 방향을 피하여 또 한 번 멈춰야 할까요. 밤하늘은 난해하지 않습니까. 목의 형태 또한.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음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마침내 부러질 때까지 기쁨의 하얀 뼈를 조심조심 깎는 중일까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소용없어요, 목의 길이를 조절해봤자. 외투 속으로 목을 없애봤자. 그래도 춥고,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시집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 중에서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9년《현대문학》에〈뿔〉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와『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가 있음.  현재 강남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