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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서영 시인 / 카프카의 잠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6.

박서영 시인 / 카프카의 잠

 

 

    비둘기는 환풍구 배관에서 겨울을 나고 날아가 버렸다

    이젠 덕지덕지 똥만 가득 쌓여있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잠의 배설물들

 

    서울 가서 본 적 있다

    점심시간 손님들이 북적대는 칼국수집 출입문 앞에

    환기구 하나조차 얻지 못한 사내가 잠들어있었다

    손님 중에는 잠든 사내의 늘어진 다리를 슬쩍 뛰어넘어

    식당으로 들어간 이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서인지

    손님들도 식당주인도 사내를 잠의 배설물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낯설고 기이한 몇 가지 풍경을 기억해냈는데

    그 칼국수집 앞에서 만난 카프카와

    서울역 광장 노숙자들이 하루 종일 만나는 예수와

    애 밴 여자노숙자의 불룩한 배와

 

    그러고 보니 서울구경 하루만에

    모녀노숙자처럼 황폐해져서 아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곤 했는데

    기차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져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우리를 냄새나는 잠의 배설물로 오해하더라고

    침까지 흘리며 쿨쿨쿨 잘 잤다

    기차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깊은 잠에 들게 했으리라

    봄으로부터 출발한 기차의 몸속이 너무 따뜻해서.

 

월간 『현대시학』 2009년 11월호 발표

 

 


 

박서영 시인

196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2006) 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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