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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위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9.

김왕노 시인 / 위독

 

 

위독은 거대한 짐승입니다.

 

위독한 사이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울부짖는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숨겼던 진실을 각혈하듯 게워내기도 합니다. 위독한 자는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하기도 합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짐승 한 마리로 먼 길을 밤 새워 왔을 때 나는 날 간 같은 영혼을 던져주려 했습니다. 살 몇 근 거뜬히 베어주려 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

스스로의 살점을 녹여 뼈마디까지 드러나게 한답니다.

무엇을 지탱하기 위해 살가죽을 밀며 드러나는 뼈마디들인지

죄마저 끝까지 버티게 해주는 뼈마디의 의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결국 죽음 속으로 무너져가면서도 왜 쉬 삭아 내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속의 어둠을 견디는 뼈인지

후략의 말 뒤에 무엇을 덧보태고 싶은지 스스로 묻기도 한답니다.

 

멀리서 그대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있습니다.

 

그대에게서 철철 쏟아져 내리는 마지막 말들이 자귀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미루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창밖의 계절은 독 오른 듯 푸르다는데

 

그대 이제 이승의 살점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말라가 피골이 상접한 짐승

그러나 지금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

나마저 화답해 우우 우는 밤이 산맥을 넘어 강을 건너

저렇게 성큼성큼 옵니다.

 

시집 『말달리자 아버지』(천년의시작, 2006) 중에서

 

 


 

 

김왕노 시인 /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황진이 네 생각이 죽은 줄 알았다. 아파트 납골당을 지날 때, 묘비가 된 빌딩을 지날 때, 황진이 생각이 새까맣게 죽어 간줄 알았다. 어디서 육탈되어 백골로 남은 줄 알았다. 난 애도나 명복 한 번 빌 줄 몰랐고

 

그러나 거리를 지날 때, 죽은 줄만 알았던, 황진이 네 생각 살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을 초월해 황진이 생각이, 긴 치맛자락 나부끼며, 창포냄새 풍기며, 자유롭게, 모든 저지선을 뚫고 오는, 황진이 생각, 붉은 입술의 황진이 생각, 진압할 수 없는 황진이, 황진이 생각

 

이제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를 찾아, 이 시대에는 없다지만 그럴수록 황진이를 찾아, 황진이 같이 붉은 칸나 키우며 황진이를 찾아, 영혼의 뿌리를 푹 담글 속 깊은 황진이,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나의 계집 황진이를 찾아, 남 몰래 살 섞을 황진이, 나의 황진이가 아니라 우리의 황진이를 찾아, 방을 붙이고, 실종 신고도 내고,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황진이, 붉은 옷자락의 황진이를 찾아, 하얀 황진이의 이마를 찾아, 조개 보다 더 꽉 다문 황진이의 정조, 죽창보다 더 꼿꼿한 황진이의 지조를 찾아

 

직장에서 거리에서, 술집에서, 강남에서, 광화문에서, 황진이 우리 황진이를 찾아,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가냘프나 올 곧은 정신의 황진이, 나를 불태울 황진이, 나를 재로 남길 황진이, 쭉쭉 빵빵 사이로 거침없이 오는 황진이, 사이트로, 극장가로, 로데오 거리로, 현상금도 내걸고, 전단지도 뿌리며, 기어코 찾아야할 내 황진이, 내 몸의 황진이, 우리 넋의 황진이, 진이 진이 황진이를 찾아

 

황진이 네게 사무치는 말이 저렇게 푸른 하늘 밀어오는데, 수수밭 사이에 초가을 호박꽃 피우며 오는데, 벌써 차가워진 개울물을 건너오는데, 말 타고 황진이 네 치마폭에 파묻히려 청동방울 딸랑거리며, 개암나무 뚝뚝 떨어지는 전설 속을 지나, 산발한 채로도 가고 싶구나. 황진아 네 은장도 빛나는 밤에, 촘촘한 넝쿨이 틈을 보이는 계절, 네 머무는 마을에 꿈이 깊고 우물물 깊어져, 마을을 파수하는 개 울음 높아가는 밤일 텐데, 너는 아직 이조의 어느 마을 모퉁이에 있는가. 기우는 사직의 뒤란에 서 울고 있는가.

 

쭉쭉 빵빵하게 다가오는 세월 사이, 저 비대한 몸짓 사이로 오늘도 보이지 않는 황진이, 난 새털구름 따라 흐르는 갓 태어난 철새 같아도, 끝없이 사방으로 풀려가는 쪽물 같아도, 네게로만 흐르고 싶은데, 황진이 네 웃음소리 청아한 마을로, 처연한 내 그리움 앞세우고 찾아 가는 싶은 데, 황진이 네 붉은 마음을 찾아, 구비 구비 너를 찾아, 첩첩 세월 건너 너를 찾아

 

시집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0) 중에서

 

 


 

김왕노 시인

1957년 포항에서 출생. 1988년 공주교대와 2002년 아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꿈의 체인점>으로 등단. 시집으로『슬픔도 진화한다』 (천년의 시작, 2002)와 『말달리자 아버지』(천년의시작, 2006),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0)가 있음. 1995년 다층문화상, 2000년 지난계절 우수작품상, 2003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년 제7회 박인환문학상, 2008년 제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