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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시인 / 보라의 바깥
눈 마주쳤을 때 너는 거기 없었다
물렁한 어둠을 헤집어 사라진 얼굴을 찾는 동안,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시선의 알갱이들이 쏟아진다 산산이 뿌려진 눈빛들이 나를 통과하여 사라져갔다
나는 도망친다 빛으로부터.
눈을 감는 순간 빛은 갇히고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건 서로에게로 건너가려는 시간들. 오늘 죽인 나비를 태어나기 전부터 기다리는 일 새로운 명명법을 익힐 때마다 공기의 농도가 진해져갔다 점점 맑아지며 밖을 향해 솟아오르는 행성의 온도
유리로 만든 베일을 쓰고 대기권을 바라본다 나는 이곳에 색(色)을 짊어지러 온 사람, 얼음조각 속에 우연히 들어간 공기방울처럼 스스로 찬란할 수 있을까 관여할 수 없고,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만져보는 순간, 세계는 투명하고 위태롭게 빛난다
이제야 나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몸 안을 떠다니는 흐린 점들을 바라본다 발밑으로 빛의 주검들이 흘러내렸다
시집 『보라의 바깥』(창비, 2011) 中에서
이혜미 시인 / 투어(鬪魚)
빛나는 가시를 세우고 너에게 갈게
보고 듣는 것이 죄악이어서 무엇도 유예하지 못하고 부서져 완전해진 무늬가 되어 헤엄칠 때, 우리가 가진 비늘이 일제히 진동한다. 지느러미를 펼치니 너와 나의 그믐
어쩌면 이렇게 단단하고 빛나는 것을 몸 안에 담가두었니
뼈, 거품 속에서 떠오른 얼굴. 그 얼굴은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네가 머물던 자리에 다른 비참이 들어선다 서로를 흉내내다가 서로에게 흉(凶)이 되는 순간. 늑골을 숨기고 촉수를 오래 어루만지면
우리는 두 개의 날카로운 비늘, 아름다운 모서리가 남겨졌다
아직은 목젖을 붉게 적시며 구체적인 오후를 꿈꾸고, 잃어버린 아가미를 찾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우리의 기도는 한 곳만을 고집스레 방향하는 일이니, 깊이 고인 맹목이라 해도 헛된 문장만은 아닐 것
그러니 함께, 멀리로 가자 아름다울 몫이 남아 있다
시집 『보라의 바깥』(창비, 201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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