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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이듬 시인 / 정오의 마음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16.

김이듬 시인 / 정오의 마음

 

 

  조금만 더 있자

  지금 꼭 사랑하지 않으면 안 돼

  저녁이면 이 느낌이 사라질 거야

 

  마리는 한 팔로는 에리카를 사랑하고 가짜 팔로는 냉소한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괜찮은데 네크라인이 맘에 들지 않아

  다른 창을 연다

 

  에리카의 머리가 똑바르지 않다는 것을 사랑하면서 관찰한다

  첫 팔로우니까

 

  너는 왜 항상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니?

  사진을 봐봐

  벽 모서리에 찢어 붙여놓은 화보 남자애들 같잖아

  한쪽은 진짜 브라운 한쪽은 진짜 블루

 

  우리는 너무 개인주의자인데 관계를 하니까 모순적이야

  개인적 평판이 좋기를 열망한다면 한 사람의 연인으로 살아갈 수 없어

 

  에리카의 부모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사는 데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그래서 예술을 하니?

  예술혼과 장사혼 사이에서 혼이 나간 마리가

  심드렁하게 에리카를 바라본다

 

  비현실적일 정도의 사랑의 관계는 비현실적으로 임시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임시적이다

  하지만 마리는 규정을 극도로 싫어하므로 보류하는 체질

 

  에리카, 너를 사랑해

  사랑은 죽어 없어지지 않아  

  우리가 온라인 쇼핑몰을 옮기듯이

  그저 이동할 뿐이지

 

계간 『모:든 시』 2019년 봄호 발표

 

 


 

김이듬 시인

경남 진주에서 출생. 부산대 독문학과 졸업. 경상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받음. 2001년 계간《포에지》로 등단. 저서로는 6권의 시집『별 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8),『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11),『베를린, 달렘의 노래』(서정시학, 2013),『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 2014),『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과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문학동네, 2012), 2권의 산문집  『모든 국적의 친구』 (난다, 2016). 『디어 슬로베니아』(로고폴리스, 2016) 및 연구서적으로 『한국현대페미니즘 시연구』(국학자료원, 2015)와 영역시집 『CHEER UP FAMME FATALE』이 있음.

베를린 자유대학 파견 작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 파견 작가로 각각 한 학기 간 강의. 2019년 상반기에 영역시집 『Hysteria』와 영역소설집 『Blood Sisters』가 발간될 예정.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22세기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출강, <책방이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