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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시인 / 북향집에서
나는 그곳에서 음악만을 데리고 왔다 오랫동안 저 혼자 무거워진 가방 속 바람을 버리고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은 봄의 영혼을 버리고 나무의 여름의 어두운 그림자를 버리고 삼백 개의 계단을 내려왔을 뿐인데 비의 잠을 깨우는 문들의 방을 버리고 선로를 바꾸고 있는 철길 위에서 잠시 두근거리다 출발하는 달의 열차처럼 스무 번의 이사에도 잊지 않고 간직했던 겨울 햇빛의 각도와 열병의 밤을 읽던 지붕 밑 계절을 버리고
뼈로 만든 찻잔에 차를 마시면 나는 접시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밤새 쌓인 어둠으로 검은 새를 접어 날리는 이 북향집 말고 비어있는 화분에도 아무 씨앗이나 날아와 잘 자라는 볕 좋은 생애 네가 만든 찻잔 손잡이가 좋구나 깊은 푸른빛에 금칠로 북국의 덩굴을 그려 넣은 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꽉 찬 방에서 나의 일은 매일 북쪽이 뜨고 지는 걸 바라보는 일 나는 이 방에 북쪽만을 데리고 왔다
《현대시학》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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