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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기석 시인 / 포파 아저씨가 선물로 준 작은 상자엔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0.

함기석 시인 / 포파 아저씨가 선물로 준 작은 상자엔

 

 

어항이 있었어요

어항은 아기의 발처럼 아주 아주 작았는데

잘 울고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젖을 물리고

햇빛을 듬뿍듬뿍 뿌려 주었더니

나팔꽃처럼 쑥쑥 자랐어요

 

어항은 조금 커져 어항 속에

연못을 하나 갖게 되었어요

어항은 점점 더 커져

포파 아저씨가 사는 마을과 숲

꽃밭과 초원과 과수원도 갖게 되었어요

포파 아저씨가 집에서 시를 쓰고

새들이 호수에서 낚시놀이를 하는 동안

어항은 점점 더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온세상을 갖게 되었어요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어요

어항은 늙어 어느새 수염이 하얗게 달렸어요

어항은 어항 속의 세상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어항 속에서 들리는 빗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소리

올빼미들의 멋진 기타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지만

어린 시절이 너무도 너무도 그리워

탁구공처럼 다시 작아졌어요

 

이제 아주 아주 작아진 어항 속에는

아주 아주 작아진 온세상이 들어있어요

온갖 동물 식물 별과 구름들이 모두모두 들어있어요

밤마다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래가 나와

바다 속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네가 기린을 상상하면 어항에선

기린이 목을 내밀고 웃고

비행기를 상상하면 비행기가 날아올라요

 

혼자 밤길을 가기가 무서울 땐

숟가락으로 어항을 탁탁 두드리며 상상해 보세요

그럼 어항에선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착한 호랑이가 나와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 줄 거예요

그러나 조심해야 해요

어항은 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들이 몰래 훔쳐 갈 수도 있으니까요

 

네 눈썹 밑의 그 반짝거리는 마술 어항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국어선생은 달팽이』(세계사, 1998)와 『착란의 돌』(천년의시작, 2002), 『뽈랑공원』(랜덤하우스, 2008) 그리고 동화 『상상력 학교』(대교출판, 2007)가 있음.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제14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