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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광 시인 / 고사목 지대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0.

이영광 시인 / 고사목 지대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 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사라져 가고

숨져 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유지를 받들 듯

산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는 생사의 양상이 바뀌어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

 

죽은 나무들도 산 나무들을 깊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상봉에서도 쉼 없이 상봉 중인 것

여기까지가 삶인 것

 

죽지 않는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 없는

이곳 너머의 곳,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무슨 신앙 무슨 뿌리 깊은 의혹이 있으랴

 

절벽에서 돌아보면

올라오던 추운 길 어느 결에 다 지우는 눈보라

굽이치는 능선 너머 숨죽인 세상보다 더 깊은 신비가 있으랴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이영광 시인

196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와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아픈 천국』(창비, 2010), 『나무는 간다』(창비, 2013)가 있음. 2008년 제8회 노작문학상, 2011년 제11회 지훈상, 2011년 미당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