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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설희 시인 / 카멜레온의 죽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0.

박설희 시인 / 카멜레온의 죽음

 

 

아스팔트 위에서 자동차에 치였다

시커먼 아스팔트빛 떨림이 멈추자

선명해진 노란색

 

저 화사한 빛깔 감추려고

덤불숲에선 이파리

알을 낳을 때는 모래알갱이

계절 없이 피고 지던 색들

 

아직 피워보지 못한

바다와 하늘, 눈과 바람……

자신을 스쳐 간 빛이 명멸하는 듯

미처 다 감지 못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고요해진 색에

햇빛이 자글거린다

 

 


 

 

박설희 시인 / 약수(弱水)*

 

 

오래전부터 당신은 건너오는 중이네

검게 뭉친 머리카락 가지런히 쓸어내리며

늘 출렁거려보지만

 

감당할 수 없는 당신의 무게

내 속의 수많은 이슬방울과 깃털들,

더듬이와 먼지도 당신의 것

 

수천수만의 당신이 내게 다가와

수천수만의 내가 마중을 가도, 고작

바닥을 내어주는 일

당신의 그림자로 그 바닥 차곡차곡 채우는 일

 

동으로 서로 북으로 남으로

당신은 여전히 건너오는 중이지만

당신으로 가득 채워져도

함께 출렁거리지도 흐르지도 못해

고요한 눈 하나 가만히 떠보다가

푸른 이끼 낀 얼굴 들여다보다가

 

먹구름 같은 머리카락 쓸어내리네

빗방울로 쏟아져 내리네

층층이 쌓인 당신을 스치네

 

* 부력이 없어 먼지조차 띄우지 못한다는 중국 설화의 물.

 

 


 

박설희 시인

1964년 강원도 속초 출생. 성신여자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 『꽃은 바퀴다』가 있음. 사)한국작가회의 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