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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시인 / 자화상 -겨울 연못
풍향계 같은 발자국만 남겨놓고 새들은 다 어디로 갔나 얼음 위에 찍힌 풍향계가 저 멀리 북국(北國)을 향해 치닫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누군가 던진 돌멩이가 얼음에 박혀 있는 겨울 연못 돌멩이가 반만 박혀 있다고 물고기가 반만 놀라는 것도 아닌데
물속을 들쑤셔서라도 고통을 확인하고 싶어 맨발로 어두운 바닥을 헤매고 싶어
풍향계가 반만 돈다고 북국이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데 새들은 왜 발자국을 남겨놓고 갔을까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누군가 나를 향해 던진 돌멩이만 바닥으로 가라앉는 겨울 연못
이 악물고, 더 깊이 바닥으로 파고드는 돌멩이들
배영옥 시인 / 사과와 함께
르네 마그리트의 마그네틱 사과 한 알 현관문에 붙여놓고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사과의 허락도 없이 문을 따는 사람
나는 이제 더 이상 과수원집 손녀가 아니고 사과도 이미 그때의 사과가 아닌데 국광, 인도, 홍옥……처럼 조금씩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
사과의 고통은 사과가 가장 잘 안다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럼에도 매번 피어나는 사과꽃처럼 봄이면 내 어지럼증은 하얗게 만발하곤 하지만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빨갛게 익어본 적 없는 사람
내가 사과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건 사과의 눈부신 자태 때문이 아니라 사과 이전과 사과 이후의 고통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할아버지도 르네 마그리트도 방문하지 않는 현관문 안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 한 알의 사과 門 안에서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
그럼에도 사과는 이미 사과꽃을 잊은 지 오래 그럼에도 나는 이미 사과를 잊은 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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