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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시인 / 메두사의 눈
넝쿨장미 묘목을 정원에 심었습니다 넝쿨장미의 푸른 잎새가 검은 대지의 뿌리로부터 나왔습니다 넝쿨장미여 안녕 기쁜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을 향해 나는 아침마다 인사하고 연구소로 출근했습니다 넝쿨장미에 숨은 불꽃의 힘을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본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습니다 태양이 빛나는 여름이 오자 넝쿨장미안의 구미호가 허공에 붉은 눈을 걸어놓았습니다
아름다움에 중독이 된 내 안의 아이에게 붉은 눈이 말했습니다 나의 백일몽 속에서 너는 내가 시간의 강에 던진 조약돌이다 너의 혼은 내가 뿌리에 물을 주고 있는 울타리의 넝쿨장미이다 나의 깊은 잠에서 너는 내가 손가락으로 집어올린 순간이자 영원이다 너는 나의 사랑으로 피어난 인간의 얼굴을 한 넝쿨장미이다
두려워라 메두사의 눈이 내 심장을 쳐다보자 내 영혼이 테세우스의 방패처럼 빛을 냈습니다 넝쿨장미는 울타리를 넘어가 천개의 감시카메라 같은 눈을 사방에 걸어놓았습니다 넝쿨장미여 안녕 기쁜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을 향해 인사하던 내 마음이 시멘트처럼 굳어졌습니다 태양과 구름과 소나무가 푸른 돌의 아름다움으로 굳기 직전이었습니다 넝쿨장미를 보는 내 눈과 나를 보는 넝쿨장미의 눈이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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