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은 시인 / 병산 수묵화
어둠이 붓을 친다 병산이 수묵화로 펼쳐진다 먹물 몇 점 떨구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만루대 넘어 가느다란 달빛, 먼 데 바다를 풀어 놓는지 강물을 파묵破墨치는 필선이 우련하다 흐르는 것들은 경계가 없다 담담하다
어둠은 저렇듯 무위無爲를 낳는구나, 비워냄으로써 완성되는 수묵 깊이에서 마음만 저 홀로 붉어 노을 낙관을 찍는 것일까
화폭 밖으로 걸어 나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밑그림도 없고 되물릴 수순도 없는 첩첩 산, 겹겹 물, 한지 밖 그대와 내가 만나는 경계는 골骨 깊은 먹빛,
굵은 일획으로도 메울 수 없는 몰골법*이다
*몰골법 ; 윤곽이나 쌍선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채색을 찍어서 한 붓에 그리는 법.
문창 2010년 가을
강영은 시인 / 여수
바다를, 품에 안은 여수에서는 바람이, 바다보다 먼저 보인다 바람의, 젖을 물고 있는 섬들과 바람의, 근육으로 다져진 해안 바람의, 등뼈에는 파도꽃이 하얗게 핀다 바다를, 놓아기르는 여수에서는 바람이, 그물 치고 그물 걷는다 바람은, 향일 암 동백꽃 입술을 물고 바람답게, 파도와 몸 섞기도 하지만 바람은, 항구보다 먼저 일어나 바람의, 입술로 뱃고동을 울리고 바람의, 어깨 위로 배를 띄운다 바다를, 놓아 보내는 여수에서는 바람이, 사람대신 통성명 한다 바람이, 사람보다 먼저 흐느끼고 바람이, 사람보다 깊게 출렁인다 바다가, 조바심치는 한 겨울에는 바람이, 눈보다 먼저 녹는다 바람의, 눈물을 받아내는 바다의, 내륙에선 짠 맛이 깊어지지만 바다 속, 녹지 않는 영토를 지닌 바람은, 모두 여수로 와서 죽는다
죽어서 봄 바다로 다시 태어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함기석 시인 / 뷰티샵 낱말과일들 (0) | 2021.07.22 |
|---|---|
| 권기만 시인 / 나나가 사랑한 외 1편 (0) | 2021.07.22 |
| 강해림 시인 / 미혹(迷惑) (0) | 2021.07.22 |
| 공광규 시인 / 얼굴 반찬 외 1편 (0) | 2021.07.22 |
| 남상진 시인 / 빗방울 화석 외 1편 (0) | 2021.07.2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