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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광식 시인 / 믹소포비아의 시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2.

고광식 시인 / 믹소포비아의 시간

 

 

자세를 바꿀 때마다

잘린 대가리가 도마 밑으로 굴러가 섞인다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칼날은 더욱 섬뜩해진다

여자는 꿈틀대며 파고드는

칼날의 통증을 서로 다른 주머니에 넣는다

 

생선 토막에서 흘러나온 노을이 미끄럽다

일몰이면서 일출인 좌판 위로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파도 조각이 얹힌다

도마는 칼자국이 선명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시퍼런 칼날에 맺힌 파도가

우럭, 광어, 도미의 지느러미를 잡는다

 

갯골은 산도를 열어 칼날 위에 선다

섞이지 않기 위하여 이름을 부른다

여자는 자꾸만 펄떡이는 파도를 하나씩 토막 낸다

너희는 서로 낯을 익히며

칼,

다르더라도 죽음을 함께 맞이하며

칼, 칼,

벌어지고 있는 바다의 가랑이를 외면하며

칼, 칼, 칼,

 

노을 묻은 칼날은 언제나 예리하고

먼 바다는 붉은 이비야(耳鼻爺)처럼 출렁인다

도마 위 꼬리지느러미를 따라 아가미가 씻겨나간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골이 뱀처럼 뜨겁게 구부러진다

 

시퍼런 칼날을 좌판 너머로 본다

바다를 기억하는 눈알들이 뒤섞여 뒹군다

칼을 행주로 닦는

소래5호 여자가 웃는다

낯선 지느러미들로 어시장은 질퍽거리고

잘리며 하나가 된 대가리들이

차례대로 5호 여자의 자궁 속으로 숨어든다

 

밀물이 들어오는 포구가 피범벅이다

갯골이 구부러진 파도를 화투장처럼 섞기 시작한다

 

* 믹소포비아(Mixophobia) : 낯선 것과의 뒤섞임에 대한 공포증

 

 


 

 

고광식 시인 / 색청(色聽)

 

 

네가 나에게 피지 않는 장미를 던질 때

도시는 폭설에 포박당하여 비틀거린다

 

노랫소리가 눈보라를 흩뿌린다

이어폰을 낀 내 발밑에 색의 계단이 놓이고

눈 감으면 너의 무릎이 떠오른다

 

끊임없이 발을 헛디딘다

달리는 자동차는 비눗방울처럼 파동친다

 

나는 색을 잡기 위해 손을 내민다

부서져 날리는 눈은 나에게만 쏟아져

너는 눈꽃 모양의 연기로 저편에 있다

 

낮은 목소리가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기다림에 젖은 버스정류장이 폭설에 묻힌다

 

소리에서 태어난 색이 커가는 것을 보며

나는 목관악기의 나팔관으로 숨어든다

 

음(音)들이 허공에 눈송이로 떠서

고음의 밝음과 저음의 어둠을 섞는다

폭설이 도시를 덮는다

 

거리엔 붉은색 유리 파편이 쌓이고

너에게로 가는 길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색청: 음(音)에 의해서 본래의 청각 외에 특정한 색채 감각이 일어나는 현상.

 

 


 

고광식 시인. 평론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 1990년 《민족과 문학》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추계예술대 출강, 시집으로 『외계 행성 사과밭』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