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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세은 시인 / 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2.

기세은 시인 / 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

 

 

아빠는 등푸른 생선을 즐겨 먹다가

바다로 떠났다

그 이후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

머리카락이 자랄 때마다

파란 물고기도 무거워진다

두통이 심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의혹이 심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루는 미용실에 갔다

파란 물고기가 다치지 않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더니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

갑자기 아빠가 불쌍해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두통이 심해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바다로 찾아갔다

머리를 흔들어 댔지만

파란 물고기는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빠 하고 불러 봤더니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들어오라 한다

지느러미가 없다고 했더니

너는 이미 등이 몹시 푸르께하다고 하며

군침을 삼킨다

 

* 천경자 화가의 그림 제목.

 

 


 

 

기세은 시인 / 눈부신 방

 

 

매트 위에서

나는 혼자였다

뒤꿈치 들고 걸었더니

둘이 되었다

퍽 놀랍기도 했다

서로에게 누구시오 라며 질문을 해댔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심심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그랬더니 셋으로 늘어났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묻는 것은 피차 예의상 그만두었다

앞구르기로 가서

뒷구르기로 되돌아왔다

도무지 부딪히지도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곧 이어 넷, 다섯…

점점 수가 늘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제각기

되돌아갈 시간에 사라졌다

퍽이나 고요한 하루였다

 

 


 

기세은 시인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제7회 《시작》 신인상 공모에 〈내 슬픈 전설의 25페이지〉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