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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돌 시인 / 언니를 생각하기까지
잠에 들다, 라는 문장을 쓰려다가 ‘언니’가 생각나다
언니를 번쩍 들다, 언니가 햇볕에 들다, 언니가 길을 잘못 들다, 언니가 철이 들다, 언니가 감기에 들다, 언니가 시중을 들다, 언니가 총을 들다
언니가 들고 있던 것들을 적어 보다
언니가 총을 들고 찾아오다 언니의 눈물은 탄창이 되자 언니와 나는 약간의 차를 마시고
각자의 총구를 물어보다 각자의 칼끝을 물어보다 각자의 적을 물어보다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적은 가늠하기 어렵다
우리가 차를 마시는 동안 서로의 이름을 흥미롭게 발음해 보고는
모든 것이 사실처럼 보였다 언니의 칼이 내 앞에 있었다
그린란드에는 창문이 없는 방이 있다고 한다
『언,어,총,회』, 금은돌 외, 테오리아, 2016, 18~19쪽
금은돌 시인 / 아, 그랬습니까
내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당신은 참 좋은 분이라 말해 드립니다.
이불 안에 품을 수 없는 행성일 때 다소 쓸쓸한 구두코 주름과 마주칠 때 두툼하고 낮은 언덕 같은 목소리에 기대어 보고 싶을 때
같은 버스 안에서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치마를 먼저 걷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만으로 내 칼을 무디게 해 줄 수 있는 호흡이어서
막 내린 공항버스에서 다른 여자의 짐을 내려 줄 때 비집고 올라오는 질투가 좋아라. 괜스레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며 먼지 날리도록 웃어보는 것이 좋아라. 행성 근처에 맴도는 것이 좋아라.
불가능, 이라는 낱말로 차오르는 넉넉한 막막함이 좋아라. 구두코 주름진 그늘 아랫자락에서 비행기 좌석 앞, 뒤, 옆에서 부서지는 먼지를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
깊은 설렘, 당신이 모르도록 엷은 인연, 그대가 모르게
10년 뒤 어느 창가에서 벙어리 손짓으로 고백해 보고는 아, 그랬습니까? 아, 그랬습니까? 하는 말, 듣고 싶어라.
《시와 사람》2015년 여름호
금은돌 시인 / 벌레 구멍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나는 비를 맞지 않는다. 빗방울은 슈퍼마켓 야외진열대 위에 떨어지고 감자칩 비닐봉지가 나뒹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그대가 우산을 펼친다. 우산은 빗방울을 방어하고, 그대는 우산 속에 몸을 숨긴다. 튕겨나간 빗방울이 거리를 날아다닌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그대 발자국.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빗방울은 접혀지며 구두코에 달라붙는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그대는 커피숍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의자에 앉은 빗방울. 의자는 물에 젖고, 의자는 흘러내리고, 의자는 맺히는 유리창을 바라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유리에 스치는 빗방울이 안경에 다가와 부딪친다. 그 방울이 목덜미에 꽂힌다. 파고드는 송곳. 방울은 살갗을 뚫고 핏줄을 베어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그대가 기침을 한다. 손으로 입을 막고 스위치를 올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빗방울은 사실을 예약한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입을 조물거린다. 숨을 덜 쉬며 좁은 방에서 날숨을 내뱉는다. 김이 차올라 안경이 뿌옇다. 제대로 내뱉지 못했던 입김이 겨우, 새가 되어 날아간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물 없는 주전자가 끓어오른다. 꿈은 칼로 잠을 자르고, 큰아이는 무작정 달을 찾겠다며 맨발로 뛰쳐나간다. 그대는 오지 않고, 나는 안전하다. 마중 나가야 할 것인가? 뱃속 아이에게 물어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다시마를 우린 물이 여전하다. 태아의 발길질이 거세지고 나는 배를 쓰다듬는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나는 하품을 한다. 후쿠시마에 비가 내리고 아이가 녹아내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영화 제목을 응용한 것이다.
《詩로 여는 세상》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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