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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옥 시인 / 붉은 수수밭
아침마다 팬티 하나를 더 가지고 다닌 적 있었다 등 떠밀어대는 바람의 손에 밀물로 들어선 지하철 안 비릿한 바다냄새가 출렁거리고 팔 하나와 가방은 어느 아주머니 가슴 위에 수평선으로 걸려 있고 사람과 사람이 침몰 직전의 배들처럼 흔들리는 시간 청바지를 입은 은밀한 부위에 어느 날은 두툼한 물고기가 다가와 살래살래 문지르다 가고 어떤 날은 배 한 척이 노를 저어와 비벼댔다 뒤를 돌아보면 점잖은 물고기의 표정들 몸 비틀어 저항하는 눈으로 쏘아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늦더라도 버스를 탈걸. 여러 번 갈아타더라도 버스를 탈걸. 치욕의 침이 입안에 흥건하게 고였다 먹은 것 없는 아침이 자꾸 헛구역질을 할 때 몸은 붉은 수수밭을 지나온 듯 젖어버렸다 개봉에서 종로3가까지 내내 어이없는 망각된 몸의 멍한 반응 그런 날은 회사 출근 도장 찍기 전에 화장실에서 젖은 팬티를 갈아입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 시집 『칼』
안명옥 시인 / 기대다
한때는 바람에 기대어 살며 흔들리던 우리집 베란다 화초가 오래 버려둔 시간 망각에 기대어 살며시 꽃을 피운다
나는 어렸을 때 서해에 기대어 살고 열아홉에 독립했을 때는 나이에 기대어 살았다 봄담에 기대어 살던 노란 꽃을 피우던 개나리처럼 스물넷에 준비 안 된 결혼을 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신발을 따라 교회에 가거나 절에 간다 옛사랑은 입산을 하고
술에 기대어 살던 선배가 하는 말, 아내는 흰머리 나면 검은머리 뽑아주고 애인은 흰머리 나면 얼른 흰머리 뽑아준다는데
나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면서 평화가 오고 평화는 차츰 불편에 기대어 사는 법을 터득한다 불편은 생각에 제 몸을 기댄다
핸드폰은 늘 무음을 좋아하여 약속을 만들지 않고 소리는 변두리에 사는 동안 자연 속에서 비로소 자유에 몸을 기댄다
귀뚜라미가 달에 기대어 밤을 견딜 때 취업 안 된 제자, 악기에 기대어 산다는 안부가 온다
-《열린시학》(2016년 여름호)
안명옥 시인 /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놀라워라,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 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 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 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했을 지도 모를 것을 지금 내게 가장 급한 것은 오줌을 누는 일 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 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 그리하여 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 변기가 아닌, 이렇게 아파트 단지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몰래 오줌을 누는 일이
일탈의 쾌감이 내川를 이뤄 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니, 어둠 속에서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내 엉덩이가 달이 되어 공중으로 둥둥 떠오른다
- 시집 <칼>(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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