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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시인 / 덤
감자 한 바구니를 사는데 몇 알 더 얹어주며 덤이라 했다
모두 멍들고 긁힌 것들이었다
이 중 몇 개는 냉장고 안에서 썩고 말겠구나 생각하는 조금은 비관적인 파장 시간이었다
덤은 무덤의 줄임말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아니지 덤으로 썩고 있는 것
상처를 모르는 철없는 싹처럼 노을 귀에서 샛별 하나 겨우 돋았다
덤으로 받아든 감자 몇 알이 늘어난 숙제처럼 무겁기만 한 길,
한 번도 불을 켜고 기다린 적 없는 집은 검은 비닐봉지처럼 적막했다
길상호 시인 / 잠깐의 민박
당신의 어깨를 빌려 잠시 묵었던 적 있습니다 낡은 침대처럼 저녁이 한쪽으로 기울 때 삐걱거리는 심장 소리가 노을빛으로 귀에 번져왔습니다 어찌 들으면 그건 또 먼 숲 나무들의 허밍 같아서 꿈속으로 자고새 자고새 자고새 자꾸 모여들었습니다 새들과 함께 나는 연습을 하다가 당신 비탈진 어께엔 늘 아픈 바람이 머무는 것도 알았습니다 버스와 함께 출렁이면서 우연히 들렀던 민박, 그곳에서 잠깐 쉬는 동안 사람이라는 방이 얼마나 아늑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문 닫아 두었던 나의 방에도 당신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길상호 시인 / 맨발을 널어놓고
햇볕에 허연 발을 내놓고 말리는 사람
그늘 끝에 또 그늘이 달라붙어서 음지를 벗어나느라 일생을 다 보냈다며
바닥이 얇아진 양말을 툭툭 털어 마루 끝에 걸어두는 사람
추위가 잠시 물러난 사이 꼼지락 꼼지락 울타리에 피어난 개나리처럼
철모르고 웃을 때 웃음에도 눈물이 맺히는 사람
발밑에 잠든 강아지의 언 발을 두 손으로 꼬옥 쥐어주는 사람
길상호 시인 / 사북
흐려진 이름을 읊다 일어난 아침 뒷목에는 차갑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사북사북, 꿈속 발자국들을 주워 담고 나는 사북 행 기차를 탔다 구름과 함께 딱 한 번 들른 적 있는 곳, 역사 앞 공중전화 박스에 서서 혼선 중인 그대 목소리를 내려놓고 멎지 않는 눈발만 멍하니 바라보던 곳, 주름 사이에서 꺼낸 낡은 지도를 펼쳐들고 탄가루 뒤집어쓴 약방 간판이나 고드름 매달린 다방의 연통을 떠올리면 기억들은 그 맛이 텁텁했다 탄광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털컹덜컹 잔기침을 해대고 나는 사북사북,을 가루약같이 털어 넣으며 창유리에 맺힌 검은 얼굴을 닦았다 언제나 과거형의 철로 끝에 놓여있던 곳, 그러나 폐쇄된 몇 개의 역을 거치는 동안 결코 사북에 닿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챙겨온 발자국도 어느 틈에 녹아서 가방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길상호 시인 / 먹먹
유령은 향나무 밑에 앉아 먹을 갈아대고 있다. 그럴수록 밤은 더 어두워지고, 그런다고 밤이 더 향기로워지진 않고, 이제는 불면을 위한 문장도 바닥이 보이는데, 슥슥슥 먹을 갈아대는 유령 때문에 또 사전을 펼쳐 놓는다. 남은 단어들은 모두 물기 가득한 것뿐이어서, 옮겨 적으면 그새 번져버리고 말 것들이어서, 먹이 닳아갈수록 밤의 꽃들은 귀퉁이가 짓무르고, 간신히 지어낸 문장은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색이 변하고, 붓을 들어 몇 개 반짝이는 별들을 지워가면서, 유령은 눈물을 몇 방울 흘려 넣고 다시 먹을 간다. 슥슥슥 그렇게 우리들의 밤이 움푹 파이고, 먹먹한 밤이 거기 또 하염없이 고여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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