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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덤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8.

길상호 시인 / 덤

 

 

감자 한 바구니를 사는데

몇 알 더 얹어주며 덤이라 했다

 

모두 멍들고 긁힌 것들이었다

 

이 중 몇 개는 냉장고 안에서 썩고 말겠구나 생각하는

조금은 비관적인 파장 시간이었다

 

덤은 무덤의 줄임말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아니지 덤으로 썩고 있는 것

 

상처를 모르는 철없는 싹처럼

노을 귀에서 샛별 하나 겨우 돋았다

 

덤으로 받아든 감자 몇 알이

늘어난 숙제처럼 무겁기만 한 길,

 

한 번도 불을 켜고 기다린 적 없는 집은

검은 비닐봉지처럼 적막했다

 

 


 

 

길상호 시인 / 잠깐의 민박

 

 

당신의 어깨를 빌려

잠시 묵었던 적 있습니다

낡은 침대처럼 저녁이 한쪽으로 기울 때

삐걱거리는 심장 소리가

노을빛으로 귀에 번져왔습니다

어찌 들으면 그건 또

먼 숲 나무들의 허밍 같아서

꿈속으로 자고새 자고새 자고새

자꾸 모여들었습니다

새들과 함께 나는 연습을 하다가

당신 비탈진 어께엔 늘

아픈 바람이 머무는 것도 알았습니다

버스와 함께 출렁이면서

우연히 들렀던 민박,

그곳에서 잠깐 쉬는 동안

사람이라는 방이 얼마나 아늑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문 닫아 두었던 나의 방에도

당신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길상호 시인 / 맨발을 널어놓고

 

 

햇볕에

허연 발을 내놓고

말리는 사람

 

그늘 끝에 또 그늘이 달라붙어서

음지를 벗어나느라 일생을 다 보냈다며

 

바닥이 얇아진 양말을

툭툭 털어

마루 끝에 걸어두는 사람

 

추위가 잠시 물러난 사이

꼼지락 꼼지락

울타리에 피어난 개나리처럼

 

철모르고 웃을 때

웃음에도 눈물이 맺히는 사람

 

발밑에 잠든 강아지의 언 발을

두 손으로 꼬옥

쥐어주는 사람

 

 


 

 

길상호 시인 / 사북

 

 

흐려진 이름을 읊다 일어난 아침

뒷목에는 차갑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사북사북, 꿈속 발자국들을 주워 담고

나는 사북 행 기차를 탔다

구름과 함께 딱 한 번 들른 적 있는 곳,

역사 앞 공중전화 박스에 서서

혼선 중인 그대 목소리를 내려놓고

멎지 않는 눈발만 멍하니 바라보던 곳,

주름 사이에서 꺼낸 낡은 지도를 펼쳐들고

탄가루 뒤집어쓴 약방 간판이나

고드름 매달린 다방의 연통을 떠올리면

기억들은 그 맛이 텁텁했다

탄광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털컹덜컹 잔기침을 해대고

나는 사북사북,을 가루약같이 털어 넣으며

창유리에 맺힌 검은 얼굴을 닦았다

언제나 과거형의 철로 끝에 놓여있던 곳,

그러나 폐쇄된 몇 개의 역을 거치는 동안

결코 사북에 닿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챙겨온 발자국도 어느 틈에 녹아서

가방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길상호 시인 / 먹먹

 

 

유령은 향나무 밑에 앉아 먹을 갈아대고 있다. 그럴수록 밤은 더 어두워지고, 그런다고 밤이 더 향기로워지진 않고, 이제는 불면을 위한 문장도 바닥이 보이는데, 슥슥슥 먹을 갈아대는 유령 때문에 또 사전을 펼쳐 놓는다. 남은 단어들은 모두 물기 가득한 것뿐이어서, 옮겨 적으면 그새 번져버리고 말 것들이어서, 먹이 닳아갈수록 밤의 꽃들은 귀퉁이가 짓무르고, 간신히 지어낸 문장은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색이 변하고, 붓을 들어 몇 개 반짝이는 별들을 지워가면서, 유령은 눈물을 몇 방울 흘려 넣고 다시 먹을 간다. 슥슥슥 그렇게 우리들의 밤이 움푹 파이고, 먹먹한 밤이 거기 또 하염없이 고여 들고,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와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2008년 제10회 천상병 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