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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배순 시인 / 어떤 염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8.

성배순 시인 / 어떤 염습

 

 

한전에서 몇 번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0원이라는 전기사용료가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기름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안 켰을 거예요

전기 요금이 부담스러워서, 배고픔을 잊으려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누웠을 거예요

예닐곱 껴입은 할머니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예전에 복지사로 일했다던 장례사가 설명한다

연락도 되지 않는 아들이 호적에 버티고 있어서 혜택을 못 봤어요

한 달 만에 발견된 노인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장판을 걷어내자 만 원짜리, 천 원짜리 돈뭉치가 수북이 나왔다

그녀가 악착같이 모은 장례비용이다

그곳에선 따뜻하게 보내세요. 굶지도 마시고요

꽉 다문 입을 열고 하얀 쌀을 소복하게 넣는다.

질항아리 가득 하얗게 핀 안개꽃

평생이 배경이던 그녀가

오늘은 주인공이다

 

 


 

 

성배순 시인 / 황사

 

 

돌아보며 버팅이며 전리품으로 끌려간 동녀童女다.

 

그녀가 피울음으로 묻혀 간 이 땅의 흙 한줌이다. 죽어서 고비사막의 먼지로 흩어져 고향 찾아 텐산산맥을 넘어오는 환향녀. 내 사람 어디 있나, 대문을 흔들고 방문고리를 덜컹거리는 눈알 따가운 이 그리움. 절대로 문 열면 안 돼, 미친 여자야, 모든 문들이 잠기고 내 남자 내 아이들이 단속된다. 온 동네를 헝클어뜨려 놓고 그녀가 숲 속 어귀에 쓰러지면, 지나는 이 모두에게 히죽 웃으면, 비로소 우리나라 마을 산에 붉은 철쭉이 핀다.

 

 


 

 

성배순 시인 / 알의 역사

 

 

산란용 닭 암컷은

알을 깨고 나온 하루 만에 부리가 잘린다

혁거세의 왕비 알영이 첫울음을 울자마자

뾰족한 구순이 잘렸듯

그렇게 까무렇친다.

비틀비틀 몸의 균형을 맞출 틈 하나 없는

좁은 사육장 속으로

던져진다.

날자, 한번 날아보자.

몸 스스로 날갯죽지를 펼치면

숭숭 빠지는 기억들.

뭉텅 찢어지는 자유.

세상을 빙빙 노랗게

죽을 작정으로 열흘을 살아

산란의 몸이 되면,

다시금 단단해진 부리가

잘린다.

주몽을 낳기 전 유화의

질쭉한 음순이 잘렸듯

우리들이 어미의 붉은 꽃잎을 찢고

세상에 피어나듯

알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성배순 시인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詩로여는세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어미의 붉은 꽃잎을 찢고』,『아무르호랑이를 찾아서』와  동화집 『세종호수공원』 그리고 시비집 『세종.충남  詩香을 찾아서』가 있음. 제2회 푸른시인상(詩로 여는 세상 주관)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