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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순 시인 / 어떤 염습
한전에서 몇 번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0원이라는 전기사용료가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기름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안 켰을 거예요 전기 요금이 부담스러워서, 배고픔을 잊으려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누웠을 거예요 예닐곱 껴입은 할머니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예전에 복지사로 일했다던 장례사가 설명한다 연락도 되지 않는 아들이 호적에 버티고 있어서 혜택을 못 봤어요 한 달 만에 발견된 노인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장판을 걷어내자 만 원짜리, 천 원짜리 돈뭉치가 수북이 나왔다 그녀가 악착같이 모은 장례비용이다 그곳에선 따뜻하게 보내세요. 굶지도 마시고요 꽉 다문 입을 열고 하얀 쌀을 소복하게 넣는다. 질항아리 가득 하얗게 핀 안개꽃 평생이 배경이던 그녀가 오늘은 주인공이다
성배순 시인 / 황사
돌아보며 버팅이며 전리품으로 끌려간 동녀童女다.
그녀가 피울음으로 묻혀 간 이 땅의 흙 한줌이다. 죽어서 고비사막의 먼지로 흩어져 고향 찾아 텐산산맥을 넘어오는 환향녀. 내 사람 어디 있나, 대문을 흔들고 방문고리를 덜컹거리는 눈알 따가운 이 그리움. 절대로 문 열면 안 돼, 미친 여자야, 모든 문들이 잠기고 내 남자 내 아이들이 단속된다. 온 동네를 헝클어뜨려 놓고 그녀가 숲 속 어귀에 쓰러지면, 지나는 이 모두에게 히죽 웃으면, 비로소 우리나라 마을 산에 붉은 철쭉이 핀다.
성배순 시인 / 알의 역사
산란용 닭 암컷은 알을 깨고 나온 하루 만에 부리가 잘린다 혁거세의 왕비 알영이 첫울음을 울자마자 뾰족한 구순이 잘렸듯 그렇게 까무렇친다. 비틀비틀 몸의 균형을 맞출 틈 하나 없는 좁은 사육장 속으로 던져진다. 날자, 한번 날아보자. 몸 스스로 날갯죽지를 펼치면 숭숭 빠지는 기억들. 뭉텅 찢어지는 자유. 세상을 빙빙 노랗게 죽을 작정으로 열흘을 살아 산란의 몸이 되면, 다시금 단단해진 부리가 잘린다. 주몽을 낳기 전 유화의 질쭉한 음순이 잘렸듯 우리들이 어미의 붉은 꽃잎을 찢고 세상에 피어나듯 알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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