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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병걸 시인 / 어둠이 환하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8.

손병걸 시인 / 어둠이 환하다

 

 

직접 보거나 만져 보며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며 살아왔다.

 

눈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을 때도

쉬지 않고 눈을 움켜잡았고

시력을 완전히 잃어 버리던 그날까지도

두 눈동자를 굴려 보며

결코, 욕심을 놓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눈은 자꾸 함몰되어

검은 눈동자가 허옇게 흉해지고 있지만

이즈음에서 나는 꼭 확인하지 않아도

믿어 버리는 여유를 배웠다.

 

앞으로 걸으며 뒤를 보아야 하는

그 걸음은 얼마나 불안한가

돌이켜 보면 나의 생은 얼마나 많은

확인을 강요당하며 살아왔었는가

 

보일 듯 말듯 그때가 답답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쉽게 믿어 버리며 산다는 것에

나의 어둠이 환하다.

 

 


 

 

손병걸 시인 /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손병걸 시인 / 3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들을 하곤 해

 

그러나 창을 연 건

언제나 투명한

저 바람의 손끝이야

 

막힌 망막을 녹이듯

바람은 어디든지

있는 힘을 다해

틈을 만들곤 해

 

안과병동 창 너머

씨앗 한 톨

언 땅을 뚫고

파릇파릇 돋아난

키 작은 저 새싹도 그래

 

이맘때면

저마다의 이름으로

혹은, 이름 없이도

몸을 여는 모두가

새로운 계절이야

 

손끝으로도 볼 수 있는

온통 푸른 봄날이야

 

 


 

 

손병걸 시인

1967년 강원도 동해에서 출생. 1997년 두 눈 실명, 시각장애 1급 장애 판정.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저서로는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와 수필 『어둠의 감시자』 등이 있음. 2006년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예술인상, 중봉조헌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