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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시인 / 고딕체로 서 있는 당신
어제라는 시간은 정말로 편안하더군요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이던 사람도 어제라는 말에서는 미소를 띄고 어제 죽을 죄를 진 것도 오늘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오늘, 지금, 현재, 지금, 이곳, 여기, 이 자리는 늘 불편해서 자꾸만 어제라는 시간을 호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립니다 그래 간밤, 만지작거리던 어제는 자꾸 부피자람을 하고, 괜시리 끌리는 당신을 생각했어요
당신이 누워 있던 페이지에 누워보았어요 아버지라는 단어가 참으로 낯설게만 느껴지더군요 명조체의 문장 가운데 유독 고딕체로 누워 계신 당신, 당신 뒤로 도래솔이 대여섯 그루 서 있더군요 명조체의 바늘을 꽂은 채 비를 맞고 선 솔잎에선 솔내음이 나지 않았어요
지난 해 벌초 갔을 때, 소나무 아래 새로 돋아나는 어린 소나무들은 낫으로 쉽게 잘리더군요 유년처럼 서 있던 도래솔 아래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니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 공기의 이동으로 대기가 흔들리는 현상, 그처럼 저에 대한 바람도 수시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녀에 대한 바람도 방향을 바꾸었지요
다시 바·람이 붑니다 당신이 누워 있는 페이지는 많이 낡았더군요 떨어진 솔잎도 솔내음을 잊은 채 바싹 말라버렸더군요 추억의 페이지에 명조체의 글씨가 희미해 갑니다 다만 아직도 아버지란 고딕체만 선명하게 남아 있더군요.
변종태 시인 / 마지막 잎새
아카시아 한 잎을 따낸다. 좁은 방을 벗어나 빌딩처럼 당당하게 서고 싶다고. 아카시아 또 한 잎을 떼어낸다, 난 빌딩처럼 서 있다. 딱딱하고 좁은 의자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얼굴이 없다 . 아카시아 또 한 잎을 떼어낸다, 얼굴 없는 감옥,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난 벌거숭이, 아카시아 또 한 잎을 떼어낸다, 벌거숭이 임금은 살아있다. 그는 매일 밤 내 방문을 넘어와 내 옷을 훔쳐갔다. 투명한 옷을 입은 채 밤거리를 활보한다. 다시 아카시아 한 잎을 떼어낸다,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왔다. 하지만 탈 자리가 없다. 아카시아 한 잎을 또 떼어낸다, 다음 두레박을 기다린다. 바람이 불고, 난 빌딩 안에 있고, 거리에 있고, 두레박 입구에 있고, 아카시아 마지막 잎새에 매달려 가동거리다가 빌딩 옥상에서 잠만 잔다. 머리맡으로 벌레 한 마리 기어간다. 할 일이 없다. 아카시아 한 잎을 떼어낸다, 아카시아 이파리엔 향기가 없다. 따내고 또 따내도 줄지 않는 마지막 잎새
변종태 시인 / 무지개, 날마다 떨어지는
1. 내 마음의 문이 열리면 그대는 나갈(들어올) 것이다
2. 도시의 언어는 수직으로만 자란다. 아파트 외벽을 타고 넌출을 뻗으며 올라가다 말라죽는 말들, 거리에서 발길에 채이고 죽어가는 말들, 횡단보도에서 횡사(橫死)하는 말들, 이따금 구름이 얼비치는 쇼윈도에 부딪쳐 떨어지는 말들, 진열장 안의 마네킹이 뱉어내는 말들,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들. 귀를 얻지 못한 말들은 공중화장실에서 의미를 사산(死産)하고,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간다.
3. 익명(匿名)의 군상(群像)들이 나누었던 수많은 말들, 그 말의 잔해(殘骸)들. 문이 열리면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말들, 그녀 혹은 그대가 서 있던 자리에서 이슬 맺힌 강아지풀이 고개를 떨구고, 바람이 건듯 불면 쉽사리 떨어져 버리는 이슬방울, 하루에 수도 없이 타고 내리는, 승천(昇天)이 금지된, 하늘에 이르지 못하는 말들. 엘리베이터 안을 맴돌다 스러지는, 의미의 사슬이 끊어진 말의 마디가 저들끼리 꼬리잡기를 하는 엘리베이터.
4. 지상의 말들은 바벨탑에 갇힌 채 위로만, 위로만 자라다가 아래로 추락하다가 고개 숙인 강아지풀에 맺힌 이슬방울, 그 속에서 떠오르던 약속의 무지개, 엘리베이터 안에서만 일곱 색깔 무지개가 떠오르고 있다.
변종태 시인 / 자벌레, 자벌레가
오일시장에서 열 개에 오백 원 주고 사 왔다는, 칠순 노모가 심어놓은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십 배는 됨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다가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온몸으로 세상을 재던 시절이 있었지 온몸으로 세상의 넓이를 재느라 어미의 생을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이의 상처를 갉아먹기도 하면서, 아, 나도 노모(老母)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비친 욕실,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 선하다
변종태 시인 / 매일 배달되는 아침
뒷목에 빨대를 꽂아 나를 빨아먹는 그대,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고소합니까. 만족한 표정으로 입가에 허연 거품을 묻히며 빡빡 소리가 날 때까지 빨아대면 내 몸은 쭈글쭈글 낡아갑니다. 몸뚱이에 인쇄된 생의 이력, 가늘고 굵고 검은 선들이 모여 내 생의 이력을 저장하고 있는 바코드를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며 내 유통기한을 들켜버린 신神의 계산대에 나는 얼마를 치르고 지나온 것일까. 그대의 손에 내가 들릴 때, 설레던 느낌은 한 모금씩 사라져가고 알맹이가 빠져나간 뒤 사정없이 버려지는 몸뚱이가 가볍습니다. 맛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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