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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시인 / 데이지 상점
데이지는 기차에서 이방의 골목을 팔고, 다른 살을 팔고, 아름다운 피 모양을 판다. 나는 창 밑에 숨어 있다가 플랫폼에 서 있는 존 레논을 쐈다. 내가 그랬다. 세상은 속았다. 세상을 속이는 법을 데이지에게 샀다.
기차 속엔 골목이 많고, 모두 한 방향의 수수께끼로, 몇 월로 가고 있는지 아무데도 도착하지 않는 기차에서 절름발이 데이지가 골목을 밀며 온다.
데이지는 저당 잡았던 외투를 승객들에게 돌려주었고 나는 존 레논의 외투로 들어갔다. 한 번도 밟지 않았던 기슭이 거기 있었다. 내가 열고 나왔던 축축한
내가 가려던 곳은 어디였는지 가방은 텅 비어있고, 상자가 되고 싶은 거대한 나무를 기차가 회전하고 있다.
나는 죽은 존 레논을 상자에 넣었고 데이지는 상자와 나와 승객들을 올려둔 가판을 밀며 간다. 나는 마지막으로 객차에 앉아 있는 선생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나를 속였던, 버렸던 선생들을 상자에 넣었다. 기차는 껍질을 뚫고 오래, 오래 간다.
손미 시인 / 못
못에 걸렸다 문지방을 넘다가 목에 걸린 몸 때문에 여기까지
키가 자라면 저걸 뽑아야지 박힌 자리를 더듬더듬 기억하며
점점 깊어지고 못은 점점 물렁해졌다
다시 만나자 사람들은 작별을 고했고 내 몸에서 피 맛이 나
침을 삼킬 때마다 주둥이가 뾰족해진다
이것만 빼면 살 것 같았다 몸에 걸린 못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고 너를 사랑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목은 힘이 세지고 엷어지면서
나에게선 점점 피 냄새가 없어지고 있다
손미 시인 / 그루밍
검은 돼지가 쏴쏴 떨어지고 장마 탈출하지 못한 우리가 담장 속에 숨어 있다
한 가닥씩 삐져나온 털이 피리소리를 따라 길어진다
나는 담장을 불렀으나 엄마는 열리지 않았다
다리를 꺾어 넣고 불을 피운다 배고픈 돼지들이 담장 위에 모여있다 자주 오줌에 젖는
뻣뻣한 몸에서 아무데도 갈 수 없는 다리만 수북하게 자라고 있다
남자가 던진 냄비를 쫓아 담장으로 온 아이가 삐져나간 내 머리털을 움켜쥔다
미지근한 손금에 쓸려 얼굴이 기괴해지고 있다
손미 시인 / 얼음
엉덩이들은 숨어서 만나고 뭔가 따뜻한 것이 뒤에 있다 벌컥, 대문을 내리고 들어오던
그가 묻는다 그 뒤에 수북이 쌓인 건 무엇이지?
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린 항상 붙어있어
뒷다리 물린 얼룩말처럼 뜨거운 짐승이 등 뒤에 있다
흐르는, 등허리
찢어진 곳을 보여주며 우리는 각자의 칸에서 부풀어 오른다
침대 밑 동전처럼 조심조심
손미 시인 / 아무 날
찾았어?
케이크를 자를 때 여기가 맞나 칼을 대고 망설이는 곳에서 맥박이 뛰고 폭죽이 터지네
손목에 힘을 주면 조금씩 열리는 골목에서 당신이 막, 사라졌고 빈 곳을 메우기 위해 나는 다급하게 노래를
케이크를 자를 때 혹시 여기 있나 잠시 멈춰서 당신이 사라진 단면에 흰 선을 긋고 거기에 누워보는 거네
찾았어? 통과한 당신? 이 초를 끄면 우리는 영영 못 볼 것 같은데
스카프 하나가 오래오래 창공을 날아가네 머리 위로 몇 번씩 칼날이 내리고 점점 갈라지네 모두 멀어지네
케이크를 자르면서 둥글게 둥글게 우리가 자리를 바꾸면서 울먹이며 나타나는 곳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내 노래는 단면이 먹네
케이크를 자를 때 울음이 시작되고 또 생일이 오네
발자국도 없이 발자국도 없이 와서는
찾았어? 칼날이 서겅서겅 떨어지며 묻네
ㅡ계간 《문학동네》 2018년 봄호
손미 시인 / 미세
나는 비에 있었다 숲이 쏟아지기 전까지
내가 삼킨 알약은 어디에 있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나
근대인의 젖은 발 긴 식탁보를 따라
도시의 모서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른다
나는 모서리를 잘라버린다
문 닫은 동물원
다락에서 숲이 잠들었다 사냥을 다녀온 숲
숲은 손바닥을 내밀어 내게 각설탕을 먹이고 흩어졌다
손미 시인 / 나의 귀신에게
잘 죽어 너 없으면 나도 없다 복숭아 옆에 복숭아씨가 나와 있고
극동 오디오에서 내게서 나온 너를 보았다 고장난 스피커 사이에서 너는 돌아오지도 않고 멀리서 물었다 나는 살아서 소리를 내고 있니? 너는 신호를 찾아 손을 번쩍 들었다 소리의 무덤에서
축축한 손잡이를 만졌다 방금 누군가 손을 씻고 여기를 나갔다 아니 들어왔다 와서 여기 있다
극동 오디오에는 나의 귀신 복숭아 옆에는 복숭아 씨
손미 시인 / 빈 집에 물방울이
똑,똑,똑,
저 소리가 나를 가져가려 발을 든다
수도꼭지가 작게 눈을 뜬다 이렇게 길게 헤어질 수 있다
긴 얼굴 하나 끈질기게 떨어지고 있다
나는 이제 깜깜한 여기서 나가 조금씩 저쪽으로 떨어지고 싶다 방울, 방울 몸을 나눠 멀어지고 싶다
종일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저 수도 좀 교체해주세요 안 됩니다 이 혀 좀 잠가주세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작별입니까
그 어떤 말도 저장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흑백의 꼭지에 매달려 길쭉해지고 있었다
출구를 찾고 있었다 뿔을 잡힌 채 한 방울씩 도망가는 나의 정령
몸속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이 뼈를 똑,똑, 뚫고 나와 쏟아지려 한다
대낮에 이불을 덮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물의 악조를 따라 핏방울이
똑,똑,똑 저쪽을 노크한다
《시산맥》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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