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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명옥 시인 / 예술가 히아신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9.

신명옥 시인 / 예술가 히아신스

 

 

구근 속에 잠자는 이름 깨운다, 히아신스

둥근 구체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 해마다 하나의 완성 위해 대지 속 작업실에서 골몰하고, 높은 줄기 향해 깊은 뿌리 내리려 미로 더듬는 중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너, 한 고개 넘지 않으면 다음 고개 보이지 않아, 달리고 넘어지고 구르면서 비탈 오르내리지, 장애물넘기, 침묵 기르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이 시간도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 중

 

상상하라, 온몸으로 다가가는 순례의 길에서 추위 이기고 피어난 꽃, 전율로 퍼지는 향기

 

너의 의지가 원하는 형상 찾는 날. 너의 기도가 오묘한 색채로 드러날 순간, 영혼 속 美의 존재 드러난 순간

 

 


 

 

신명옥 시인 / 댈 하우지 탕의 물고기

 

 

  고온 다습한 열대우림지대

  바닷가에서 자라는 망그로브 나무

  물관을 따라 굴러 내려가자 사방으로 뚫린 수많은 동굴

  너를 피하여 방향감각도 없이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멀어질수록 가벼워질 줄 알았다

  너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금물에 뻗은 뿌리가 진흙 속으로 파고들었다

  바깥세계는 차단되고

  내가 보이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너는 내게 끈질긴 채권자인지 모르지만

  도망치는 만큼 채무가 불어난다는 걸 알았다

  망그로브 숲이 조금씩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 것을 아니?

  막다른 바닥에서 너는 제안 한다

  동굴 속에는 수많은 통로가 있다

  뿌리가 빨아들인 수액이 강처럼 모여 통로를 타고 바다에 이르는 길

  내게서 벗어나려면

  물관을 따라서 올라가거라

  오르는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아야 한다

 

 


 

 

신명옥 시인 / 일 빼기 일은

 

 

  생명력이 줄어들어 죽음에 가까워 질 때에야

  0은 나를 찾아오지

  반은 땅 위에 반은 지하에 묻힌 채

  0속에 들어간 몸

  일부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분해되기도 하지

  살아 있으면서 0이 되어보는

  꿈을 꾸고 있지

  허공은 0의 완벽한 실재

  그걸 보면서 0이 되는 연습을 하지만

  언제나 느껴지는 흔들리는 존재와 홀로라는 수

  흔들림을 지우고

  홀로에서 하나를 빼기 위해

  먼저 꿈틀거리는 기억을 뽑아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까지

  땅속으로 내려가지

  불안과 두려움이 달라붙지만

  그것마저 놓아버릴 때

  비로소 나는 완벽한 허공이 되지

 

<시인시각> 2009년 겨울호

 

 


 

 

신명옥 시인 / 꽃게 법사의 상륙기

 

 

  왜 열 개의 다리는 마음보다 먼저 나가는지

  집게발의 움직임은 누군가에게 공포일 수 있는지

  먼저 탐욕적으로 솟구치는 거품과

  잡은 것은 결코 놓지 않는 집게발을 잘라내고

  등에 붙은 단단한 딱지를 눌러 시커먼 분비물을 빼낸다

  등딱지와 몸을 떼어내고 아가미를 자르는 동안에도

  남은 발들은 로봇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끝까지 욕망을 놓지 않으려는 열 개의 다리

  저 본능까지 없애려면

  끓는 물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드디어 게는 집착을 버리고 제 빛깔을 찾는다

  빨갛게 익은 바닷게는 건드려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접시 안에서 열반에 든 자세로 얌전히 있다

  수양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수도가 잘 된 게라고

  입맛을 다시며 몰려들었다

  살을 발라내며 누구나 경배하게 되었다

 

 


 

 

신명옥 시인 / 가을

 

 

고독이란 위스키를 들고 온 친구

한 잔을 먼저 건네주고는

취기가 깨기 전 돌아가 버리는

예의 바른 나그네

가을을 읊으려 할 때쯤이면

벌써 창밖엔 흰 눈이 내린다

취하지 않은 눈으로 가을을 보고

사냥꾼처럼 그 영상을 잡고 싶지만

가을은

가슴을 휘젓고 떠나버린 사람 같아서

가을엔 가을을 말할 수 없다

 

 


 

 

신명옥 시인 / 변증법적 갈등

 

 

포도를 통째 달라는 A,

알알이 떼어 달라는 B의 주문사이

포도를 먹는 방식

한 송이 포도로 A와 B를 만족시킬 방식

 

달다와 짜다로 반응하는 방식

겉이 희고 딱딱하고 각진 것으로 닮은 방식

 

소금과 설탕이 함께 녹아 절묘한 맛을 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변증법적 방식

 

포도를 나누네, 반은 통째, 반은 알알이

A와 B에게 반대로 줄 때 어떤 반응 보일까 기대하면서

주문과 주문 사이 해답 찾는

 

신명옥 시집 ‘해저 스크린’

 

 


 

신명옥 시인

1962년 경기도 파주 출생. 2006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해저 스크린> 2017년 세종우수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