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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강우 시인 / 서술의 방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9.

제15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심강우 시인 / 서술의 방식

 

 

개미를 낱말로 개미들을 문장으로 아무 데나

펼쳐진 개미집은 구멍 난 책으로 읽는다

여왕개미의 혼인비행은 표지를 장식한 제목이다

첫 문장의 고비를 넘기면 문장이 문장을 물고 나가는 법,

잉크병에서 듬뿍 찍어낸 낱말들이 길바닥도 모자라

나무와 새의 몸통까지 적어 나가는 왕성한 필력

아파트 화단이며 담장이며 경계 너머

창틀과 침실까지 서술하는 바람에

주제를 벗어났다는 비판에 시달린다

낱말을 쿡 찍는 지적보다 신발밑창 단위의 어절로

지워지는 현실, 그래도 마침표를 찍지 않는 건

분량 제한이 없어서일까

 

당신과의 만남을 제목으로

내 몸에서 빠져나간 문장을 생각한다

처음엔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 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가지런히 써 내려갔었다 연애와 혼인엔 수식이 많았고

아이를 키울 땐 각주가 많았다 변명과 책임만으로

다 쓰지 못한 본문은 늘 빈약했지만 금박 장정,

베스트셀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구름은 그래서 과중하다 싶으면 비를 내리고 강과 바다는 뜨거운 태양과 거래를 했던 것이다

체중을 줄여 나갔던 것이다

 

오타로 찍혀 찾아온 공원 벤치

풀린 구두끈을 타고 구겨진 바짓단을,

그 위의 보푸라기까지 설명하려 드는

저 문장의 행갈이를 선뜻 털어버리지 못하는 건

적정한 매수(枚數)를 잊고 살아온 까닭이다

상투어를 버리고

군더더기를 버리고

아직 묶지 못한 나란 원고를 퇴고 중이기 때문이다

 

 


 

 

심강우 시인 / 색

 

 

사태가 났다

무너져 내린 단풍의 잔해로

욱수골 저수지 가는 길이 막혔다

붉은색이 엷어져 가는 세월이었다

당신과 나눈 말들이 몇 번 피고 졌는지

옹이로 갈라진 내 몸피를 보면 알 수 있을는지,

물의 냄새에는 여태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장고의 시간은 묵은 화약처럼 푸슬푸슬 흘러내린다

저수지 가는 길, 검붉게 찍힌다

 

짙은 색들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계절이 만나는 둑길, 겹쳐진 색 한가운데 서서

나는 방금 바람이 복원한 파랑을 내려다본다

경사진 마음에 희미한 목소리들이 찰랑거린다

내 몸의 낡은 색들이 물에 풀려간다

 

시간은 색이다, 아주 오래전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내 몸이 그린 곳곳에 당신의 바탕색이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묻어나면서 나는 이제

채도와 명도가 너무 낮은 색,

어느덧 저수지에 또 다른 색이 어린다

무너져 내린 단풍이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거기 초록의 웃음 하나가 하얀 미소에 스며드는 걸

본다, 내가 물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내 온몸을 다 그려도 아깝지 않았던 색, 당신

 

―심강우 시집 『색』 (현대시학, 2017)에서

 

 


 

 

심강우 시인 / 기울어진다는 것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자전하는 건 달 때문이야

햇빛이 골목을 찾기 좋게끔 수그린다는 것

조수 간만의 차로 조개 낙지가 개펄을 경작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변화무쌍한 사계의 색깔이 당신과 나

빛바랜 마음을 때맞춰 갈아입힌다는 것

장대 끝을 쥔 달의 손, 은근한 악력 덕분이야

 

장대가 꺾이고 출렁, 달이 떨어져 나간다면

자전축이 바뀌고 지구의 혈압이 급상승할 거야

개펄은 마르고 열대와 혹한을 오가는 폭풍도 생기겠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찻집 같은 지대가 없다는 것

낮과 밤, 계절의 얼굴도 그게 그거여서 화가나 시인들은

자신의 얼굴을 이젤에 걸거나 원고지 칸에 가두고 말 거야

 

언젠가부터 당신은 달을 동경하고 또 달의 힘을 믿었던 거야

그윽한 시선으로 그들의 심중(心中)을 떠받치고 있었던 거지

당신은 태생적으로 삼엄한 직각의 자세가 불편한 사람

그들의 각도가 가파른 층계를 만들 때에도

당신은 웃음으로 각의 기울기를 유도하지, 그것은

허리를 굽혀 층계를 내려오거나

최소한 어깨를 낮춰 악수를 청할 때 생기는 자세

알면서도 썰물로 드러나는 속내를 들킬까, 주저하는 자세

그들이 당신의 인력(人力)에 서서히 끌리면서 일정한 궤도가 생겼어

23.5도 비스듬한 번지와 번지를 잇는 산책로가 생긴 거야

 

마음의 기슭에 찰랑찰랑 물결이 마르지 않고 미풍이 불어오는 것도

기울어진다는 것, 그들이 갓 볶은 커피 향을 맡으며 대화를 나눌 때

어느 시인은 비로소 아름다운 사계의 풍경을 원고지에 담기 시작해

펜을 든 시인이 찍는 잉크가 달의 몸에 고인 크레이터*라는

사실을 마침내 그들이 믿게 된 거야

 

*크레이터: 달은 지구로 오는 운석을 막아준다. 크레이터는 운석이 충돌하면서 생긴 깊은 웅덩이.

 

 


 

 

심강우 시인 / 쌀과 살

 

 

불린 쌀을 안치면 밥이 된다

살을 불리면 때가 된다는 점에서

쌀과 살의 거리는 한 음절 이상이다

 

쌀은 살을 찌운다

살이 빠진다고 쌀이 불어나는 건 아니다

쌀통과 몸통의 함량은 질적으로 다르다

쌀로 빚은 술을 마시면 취한다

쌀로 만든 떡을 먹으면 배부르다

흥에 겨워 홍조를 띠는 것도

포만감에 배를 쓰다듬는 것도

애초에 쌀이 있어 가능했다

 

가만 보면 쌀과 살은

음소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지만

전혀 닮지 않았거나 매사 끈끈하다

세상일이 그렇다

쌀이 살을 규명하거나

살이 쌀을 규정하거나

 

 


 

심강우(본명 심수철) 시인

1961년 대구 출생. 대구대학교 일문학과 졸업.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3년 제15회 수주문학상 수상. 2014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시 부문 신인작품상. 2018년 소설집『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으로 제29회 성호문학상 수상. 2019년 대구문화재단 주관 <2019년 개인예술가 창작지원> 수혜. ?2016년 동시집『쉿!』, 2017년 시집『색色』, 소설집『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현재는 국어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