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두호 시인 / 탁상공론의 아름다움
우리는 탁상 위에 턱을 괸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것들이 떠오른다 라운드 테이블 위로
예를 들어 내가 젤라틴을 부정한다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면 열매는 가로수 이마들에 달라붙고 아이스크림과 혓바닥의 유비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노조의 대표단은 사측의 입장에 맞서 무한한 궐기를 양보하므로
투우의 쟁기질과 쟁취의 입씨름이 윤리적이다 탁상에 있어서 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측 대표의 금이빨은 마침내
어금니를 간다 밖에 매달린 누군가는 창을 닦는다 아마도 깊은 잠에 소환되었는지 탁싱 위 아이스크림은 젤라틴으로 변한다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희비가 엇갈린다 급한 불은 끄고 봅시다 우리에겐 연중무휴 가동되어야 할 공장이 있지만 젤라틴은 누구의 취향에도 타협하지 않고 주사위처럼 구르는 단어들이
혓바닥의 유무를 의심케 한다 각자의 의자는 도무지 융통성이 없으므로 모두의 원탁이 유연해져야만 한다
그들만의 허황된 이론에 골몰하는 한 연인은 시간의 정물이 된 감정들을 가지고서 탁상 위에다 주사위를 던진다 형태 속에서 각설탕의 구조는 은밀하다
라운드 테이블이 있는 어디로든 그날그날의 쟁점처럼 햇빛은 떨어진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솔직한 심정을 내보이고 연인의 혓바닥은 각설탕을 난도질한다 난항을 겪던 협상이 늘 결렬되지만
탁상을 탓할 수는 없다
탁상과 아이스크림과 혓바닥의 삼위일체 속에서 누군가 젤라틴을 혐오한다면 우리는 저마다 턱을 괸 채 테이블 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 『문예중앙』 2013년
신두호 시인 /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풍경은 징후와도 같은 울림으로 포착된다 더 이상 호소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을 때 문 앞에서 증식하는 문을 보았다 유리볼에 담긴 샐러드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안하게 됐다 소독과 오염이 구분되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의 고해를 위한 몇개의 빈소를 마련하고서 그럴 때마다 공사 중인 화장실을 찾아다녔지 실례지만, 화장실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각자의 의도를 지닌 손가락을 분류하여 의도에 반하는 움직임들을 수집하고 싶었다 너와 무관하게 소화되는 과일들 눈을 깜빡일 때 고려하는 빛의 요소 온순한 바퀴가 겪는 지면의 굴곡 심박수를 결정하는 것을 말해주진 않겠지만 문을 열고 문을 열고 그 안의 문을 밀면서 방울로 떨어지는 물은 멈출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녹슨 거울이 이끼로 뒤덮이기까지 목관악기를 채우는 지문처럼 세공할 소리의 조각을 남겨두었던가 먼저 눈을 감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다툼에서 우리는 서로의 충혈된 눈을 감겨주었다 째깍거리는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 창백한 손목들에 귀를 가져다 대면서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면서 고백했다 몇번의 비명과 함께 날이 밝아오고 구겨진 신발들이 구석에서 벗어나게 되면 물이 멎듯 고요해질 선언들로 남아
신두호 시인 / 언행의 세계
눈을 깜빡여봐 파도를 발음해봐 네 언행을 볼 수 있게
결재서류를 낭독하듯 연주자들은 소리로 끝없이 떠내려가는데
새의 발목에 소문을 달아주고 계절이 바뀌길 기다리는 건 정당할까 당국의 허가는 없지만
이 새는 지하를 날아볼 용의가 있어 누군가의 어깨 위에서 날개를 접을 수도 있어
너는 제자리에 발목이 붙잡힌 몸 눈을 깜빡일 순간에 다가가
불빛들이 지상의 파라솔을 다독일 때면
집단을 이루어 춤으로 떠밀려 가는 새들 바람이 지하를 관통하는 게 보여
세계가 차례대로 한 량씩 네 머릿속을 통과해 지나가는 게
한없는 눈을 깜빡이면서
신두호 시인 / 일몰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낭송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음성의 주인이 당신은 아니었습니다. 사주 받은 목소리. 누군가의 부탁에 의해서, 협박이나 찬양이 아니며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나지막한 소리들은 지난날을 말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유 없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당신이라는 비참함. 공 안에 들어가서 공을 굴리는 사람처럼 우리는 물 위를 걷는 느린 기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억된 즐거움은 떠올릴수록 즐거움에서 멀어지고, 들판이 어느새 사막으로 돌변할 때 느껴지던 생동감. 많은 소식들이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되었음을 압니다. 이야기들이 너무나 선명했기에, 다급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해명의 여지마저 잃었습니다. 오라며 부르는 손짓. 그를 따라 마주잡게 된 손이 스르르 풀려날 때, 우리는 현실로 도피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의 길로 무한히 멀어지는 대화 속에서, 체취가 기억을 상실할 때. 현장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목격된 소식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습니다. 서로에게 아수라장이었습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민 시인 / 게헨나 외 4편 (0) | 2021.08.19 |
|---|---|
| 박성우 시인 / 물의 베개 외 2편 (0) | 2021.08.19 |
| 박남희 시인 / 내 안의 새 외 2편 (0) | 2021.08.18 |
| 손병걸 시인 / 어둠이 환하다 외 2편 (0) | 2021.08.18 |
| 성배순 시인 / 어떤 염습 외 2편 (0) | 2021.08.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