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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 시인 / 게헨나 - 한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건너는 게 죽음일 거라고 오늘 밤 기록한다.
1 풍 맞은 아버지에겐 방문 밖이었고 나에겐 방문 안이었다.
2 오 년 동안 S와 갈 데까지 다 갔다. 그해 봄, S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는 2년 뒤 가을비 구질구질 내리던 날 유부녀로 나타났다. 나는 그 봄부터 그 가을까지 밥 먹고 똥 누고 잠자고 생물학에만 충실했다. 머잖아 설악산 가을이 쓰러졌고 쓰러짐을 배경으로 모르는 여자랑 사진을 박았다. 나는 벌레도 어쩌지 못할 위인이지만 간혹 아내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하곤 한다.
3 권 반장이 윤 반장 아내와 야반도주를 놨다. 권 반장은 허리 아래에 지옥 한 개를 더 건축한 것이고 윤 반장은 머리에다 지옥늬 도면을 옮겨 놓은 셈이다. 권 반장 아내는 농약을 마셨지만 죽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도 생지옥을 허우적거릴 것이다. 혹 지옥탈출에 성공했더라도 그녀는 믿음의 딸이므로 자살=지옥의 등식에 의해 그 결과 값은 같게 된다.
4 장미꽃도 지옥에서 왔다. 타오르는 불덩이를 온몸으로 밀어내며 죽음을 게워낸다. 당신도 이 지옥을 건너가면 저 지옥에서 장미나 영산홍을 게워낼 수 있다. 잘하면 미친 꽃도 게워낼 수 있다. 꽃을 함부로 꺾는 것은 무의식 안에서 지옥이 꿈틀대기 때문이다.
5 죽지 않고 혀만 자른 오대수를 위해 울어주곤 했다. 그는 지옥을 향해 나비처럼 가볍게 날았어야 옳았는데 나비 대신 괴물이 되었다. 어떤 경우엔 유황불 펄펄 끓는 게헨나도 구원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신에게 구원을 받았지만 오대수는 벌레에게도 구원받지 못했다. (흑흑)
안민 시인 / 사건지평선까지의 거리 - 내가 속한 별은 어두운 구석이고 네 혈액형은 람다(,Λ)
가을을 지워도 여전히 가을, 너는 손가락마다 우물을 지닌 바람, 우물이 흔들릴 때마다 비가 내린다 비의 표면에 맺히는 별빛들,
나는 늘 흘러가고 너는 비 내리는 요일에만 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바람은 여전히 우울증을 앓는다 먹빛 일기에도 금세 들키는 표정처럼
우울은 화이트홀까지 계속될 테지만 그곳은 천체 망원경으로도 관찰된 바 없다 그러나 소멸 안쪽에서도 움찔대며 태어나는 입자들, 흘러가는 나는 사건지평선에 근접해 있다 그것은 우울한 비에 노출되었기 때문
오늘, 바람이라 명명하는 네 전생은 흐린 나무,
별빛을 모으면서 결빙되었다가 해동되었다가 부서지면서 바람이 된 너, 기억 속의 천문학자들 또한 그들의 별에선 나무였다 나보다 한발 앞서 사건지평선에 도달한 그들,
몸속으로 비가 샌다 어떠한 절망도 중력보다 무겁다 저 너머의 별에선 왕비와 병사가 참수당하는 게 보인다 불륜을 목격한 나무의 목에 걸리는 밧줄, 중력에 동의한 그들,
비는 무겁게 내리고 새는 음악을 작곡하고 누군가는 우주에서 가장 어두운 섹스를 꿈꾸고
네 혈액형이 내 눈동자에 번진다 사건지평선에 도달할 시간은 어제 내린 비와 내일 내릴 비만큼의 거리
안민 시인 / 어제 - 하나의 절망이 가고 하나의 절망이 흘러오던
잠들지 못한 어둠마다 폭우가 쏟아졌다 비는 포말이 되어 끓었고 그러한 어둠 저편, 사자死者가 버린 눈알 속에서 내 어린 날, 눈물 흘러가는 게 보였다 말보다 울음을 먼저 배웠던 게 금번 생에서의 가장 큰 실패, 한 번 흐느낄 적마다 누군가의 손에 끌려 먼 대륙의 우기에 다시 또 다녀와야 했다 띄워 보낸 종이배 행방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안민 시인 / 어둠론
회색 알갱이들이 흐르고 있다 불면의 눈동자 위로 천천히 떠가는 알갱이와 알갱이, 이것을 길의 입자라고 부르자 그리고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길을 뼈라고 부르자
길 밖의 길은 몸 안쪽에 있다 고독한 자는 길을 잃었을 때 지도를 구하는 대신 어두운 거리에서 제 뼈의 냄새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서성이다 길이 되는 사람들, 이들을 낭인이라고 부르자
시한부 길을 눈치챈 이가 울고 있다 무거운 음률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한편에선 눈을 도둑맞은 여자가 해머로 피아노를 부순다 이러한 풍경을 아방가르드라 부르자
결빙된 동물의 잔해처럼 부스러진 시간이 혼미하다 아방가르드 혹은 난해한 미로를 몸이라고 부르자
길이 엉켜버리거나 무너진 이들은 미로의 심정으로 제 몸을 데리고 녹슨 십자가를 찾는다 이들을 병인病人이라고 부르자
계단 난간에서 말기 병인이 무너진 길을 흘리고 있다 눈에서 입에서 귀에서 길이 흘러나온다 흘러나와 흩어져 날린다 이 모든 미로와 피아노와 난간의 표정을 장막이라고 부르자
장막이 펄럭이는 지금, 당신도 흘리고 있다 회색 입자들을
눈; 무너진 길을 버리는 배출구 [비슷한 말: 입, 귀] 밤; 아방가르드 혹은 미로의 유전자 풀(pool) 어둠; 복수複數의 회색 알갱이 [같은 말: 길(뼈)의 입자들]
안민 시인 / 사막의 풍경
등허리로 어둠이 내리면 희뿌연 바람이 불어온다 등을 눕힐 때마다 살갗에 붙은 모래 알갱이 송곳처럼 파고든다 오랫동안 무덤을 짊어지고 사막을 건넜기에 등은 점점 휘어진다 등짝에 저장된 기억을 불러내면 눈빛 깊은 낙타가 흘러나왔다가 모래처럼 무너져 내린다
나는 표정 없이 앞으로만 걷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멈춘다는 건 해 질 무렵, 사막의 능선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과 같다 다쉬테 사막, 석양을 배경으로 시아 무슬림이 사체를 짊어지고 메카로 향하던 모습을 본 적 있다 점처럼 작아지던 사내의 등은 적요한 문양을 풀어냈다 그때도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에 낙타가 무너져 내리며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등 후면으로만 무늬를 남겼는데
변곡선, 까만 점이 될 때까지 가 본 적 없는 대륙의 사막을 횡단하면서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아 무슬림 성자 이맘 레자처럼, 이승의 끝 날까지 낙타도 대상도 없이 등에 짐을 짊어지고 모래를 밟을 때, 새들은 휘파람을 작곡했고 나는 아버지 뒤편에서 새를 사육했다 등 앞쪽의 계절은 모래 폭풍 중이었으며 어둠은 짙었다 아버지의 후면이 아닌 전면의 문양을 입관 때야 겨우 볼 수 있었는데 사막 경계 부근에 다다라서인지 참으로 고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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