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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천 시인 / 낙관적인 빗방울
나무도 들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았을 저 종이비행기도 모두가 비에 젖어 침묵으로 풍경의 일부가 기꺼이 되어주는 시간 그 회고적인 장마 풍경을 본다
풍경이 다른 풍경으로 먹물처럼 번져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경계 밖에서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무슨 특별한 기별이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순진하게 어떤 기별을 기다리다 토란잎 위를 통통 구르는 낙관적인 저 빗방울을 부러운 듯 오래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다 또 적적한 마당 여기저기를 거닐어도 본다
문득 당도한 어떤 기별을 앞에 두고 어쩌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예 바지를 걷고서 집을 나와 우산도 없이 한참을 걸었다 무슨 유혹에라도 빠졌더라면, 그러나 나는 맨정신으로 한참을 더 걸어가 잠시 비 그친 가로등 아래서 젖은 두 손을 펴서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천 詩集(문예중앙 시선ㆍ11)『국외자들』중에서
여태천 시인 / 치명적인 부재
나는 이제 암흑의 허공에 앉아 당신을 본다 그것은 어쩌면 부재의 사태
총천연색이 단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는 순간 흑백의 표면으로부터 길게 종적을 남기며 빛이 날아오른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소문의 꼬리가 불태환(不兌換) 기호처럼 여기저기 떠돌고 영원히 떠나지 못할 사태의 기억만이 당신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
사각사각 소리내며 내 몸을 빠져나가는 에네르기 난 느리게 세상을 살아왔으므로 당신의 외출이 언제까지인지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 당신을 기다린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당신의 말을 간절히 믿었으므로 머지않아 나는 고독해질 테지만
정전(停電)의 순간 움직이는 것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 이 허공에서 허락받은 짧은 침묵을 위해 난 그저 맨얼굴로 당신 앞에 서 있다
조금씩 당신의 나라로부터 멀어지고 그때, 모든 장면들은 빛이 사라지는 것으로 완료될 것이다
여태천 詩集(문예중앙 시선ㆍ11)『국외자들』중에서
여태천 시인 / 절망
말라 떨어진 줄사철나무 잎을 작은 새 한 마리가 밟고 지나간다 바스락, 조로(早老)한 나무의 비명 소리
도심의 숲에서 부는 8월의 뜨거운 바람은 내 질긴 피부를 뚫고 횡단한다
새는 바람을 타고 일찌감치 나무를 떠났는데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근심이 자란다
여태천 詩集(문예중앙 시선ㆍ11)『국외자들』중에서
여태천 시인 / 책을 읽는 일
급하게 꺾어지는 도로를 채 못 따라가는 그대의 느린 시선이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부를지도 모르는 밤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주위가 파랗게 보이는 까닭은 멀리서 밤을 밝히는 공장의 불빛 때문은 아닙니다 어느 영혼이 이 도로에서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길의 입구나 출구에서 파는 책에 적혀 있습니다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왼쪽에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큰 무덤의 주인은 죽어서도 사람 여럿잡아먹었습니다 오른쪽을 보세요 함께 죽은 처녀의 시퍼런 눈이 빨갛게 변했습니다
조심하세요 가까이에서 길을 안내하고 이는 것들은 끝에 가면 늘 딴소리를 한답니다 믿을 건 속력입니다만, 지금은, 무덤의 주인에게 바칠 술을 조금씩 나눠주세요 얼마 가지 않아 14번 도로를 만날 겁니다 누구든 그림자를 오래 밟고 있다 보면 발에 쥐가 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건성으로 저를 읽는 편이죠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어디에나 마지막 구원은 있는 법이니까요
여태천 시인 / 만약, 걸어가는 그대는 - 그대가 무작정 이곳에 서 있다면, 손에 땀이 나고 머잖아 등이 따가울지 모른다
그러므로 오후 4시에 귀를 막고 걸어가는 그대는 잠시 귀를 열어두어도 좋다 알 수 없는 거리의 음악이 그대의 작은 귀에 쏟아질 때 여기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내리는 비처럼 음악을 맞을 것이다
오후 4시에 눈을 감고 서 있는 그대는 이제 감았던 두 눈을 살며시 떠도 좋다 흔들리는 가로수와 가로수의 저 늙은 잎들이 숨죽이고 있는 오후를 모르는 척 허물어도 좋다
어쩌다 그대가 이곳에서 길을 잃어도 행여 다시 오지 못하더라도 오후의 그림자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그대는 지금 세상에 없는 도로를 걷고 있으므로 그 길 어디선가 음악처럼 비가 내려도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도 괜찮은 것이다
여태천 시인 / 그대를 찾아가는 어느 여행
마주 앉아 있는 그대가 흔들리는 창밖을 바라볼 때, 나는 보지 않는 6월 14일자 일간신문을 접고 보이지 않는 역사(驛舍)를 생각한다
바람에 턱없이 부풀려 흩어지는 긴 머리털과 6월의 냄새가 충동적이라면
줄곧 앉아 있는 그대의 불안한 자세에 관심이 있었을뿐이므로, 나는 그대가 왼쪽 다리를 꼬고 있거나 오른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때도 불편하게 그대의 자세만을 생각한다
그대의 넓적다리에 얼마나 많은 피가 고였을까, 활처럼 휜 그대의 허리에 무리는 없는 것일까, 조금 전 다리를 바꾸었을 때 받았을 하중(荷重)에 대해
나는 지금 어떤 자세가 만드는 알 수 없는 사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눈은 필요 없이 예민해서 열차가 벌써 어느 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그대의 꼬인 다리에 대한, 넓적다리에 쏠린 피에 대한, 그대의 허리에 대한 그리고 하중에 대한 관심을 6월 14일자 신문지 사이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객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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