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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우 시인 / 물의 베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9.

박성우 시인 / 물의 베개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박성우 시인 / 나흘 폭설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간혹 빈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는 발길도

점방에 담배 사러 나가던 발길도

이장선거 끝난 마을회관에 신발 한 켤레씩을 보탠다

무를 쳐 넣고 끓이는 닭국 냄새 가득한 방에는

벌써 윷판이 벌어졌고 이른 낮술도 한자리 차고앉았다

 

허나, 절절 끓는 마을회관방엔 먼 또래도 없어

잠깐 끼어보는 것조차 머쓱하고 어렵다 나는

젖은 털신을 탈탈 털어 신고 다시 빈집에 든다

 

아까 낸 눈길조차 금시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도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당겨 덮고 누웠다

 

하얀 어둠도 눈발 따라 푹푹 쌓이는 저녁

이번엔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

흰 무채처럼 쏟아지는 찬 외로움도 예외일 순 없다

 

 


 

 

박성우 시인 / 딸의 아들

 

 

우리 딸 몇 살? 하면

엄지와 검지를 엉성하게 펴는 딸내미가

아들 아들, 하면서 장난을 걸어온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쪄? 하면 또

아들 아들, 까무러칠 듯 까르르

뒷걸음치다가는 까르르까르르 안겨온다

아빠가 우리 딸 아들이야? 물으면

딸애는 더 신이 나서 아들! 아들! 한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딸의 아들이 된다

허나, 해 바뀌어 고작 세 살배기가 된

딸내미한테까지 내가 아들로 보여지다니,

그렇다면 나는 세 여자의 아들?

어쩌다 안부전화라도 걸면 아들! 하면서

반가운 표시를 하는 노모의 아들이고

우리 집 큰아들! 하면서 가끔 놀리는

아내의 철없는 아들이다

여기에 딸내미까지 날 아들이라 부르니

난 졸지에 어머니가 셋이다

하긴 아빠라는 어깨 눌리는 말보다

그냥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애비 노릇을 못하면 측은한 애비가 되지만

아들 노릇은 좀 못해도 그냥 아들이니까

아들 아들, 장난 걸어오는 딸의 아들이 되어

아빠 노릇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나는 기꺼이 세 여자의 아들이 된다

 

 


 

박성우(朴城佑) 시인

1971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외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동시집 『불량 꽃게』, 청소년시집 『난 빨강』 등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윤동주젊은작가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