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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엄원태 시인 / 갯우렁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1.

엄원태 시인 / 갯우렁

 

 

갯우렁은 연체동물

백합조개를 잡아먹을 때

껍질에 빨판으로 달라붙어 가만히 있다

 

마치 꼭 껴안고 있는 듯 보일테지만

나중엔 백합조개의 볼록한 이마쯤에

 

갯우렁은 빨판으로 조개껍질에

드릴로 뚫어놓은 듯 정확한 원형의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몸짓에

집요한 추궁,

뜨거운 궁구가 있었던 것

갯우렁의 먹이사냥에는

가차없는 집중력이 숨어 있다

 

너를 향한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게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시집 <물방울 무덤>2007년 창비

 

 


 

 

엄원태 시인 / 무릎을 잊어버린다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책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되자 무릎은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시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은 탓일게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꼭 챙겨드려야 마지 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시며 아주 시위를 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안깨물어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대척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로 홀로 떠돌아다니며 아프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각별하시다. 아우는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 내리사랑이라고도 했던가. 슬하에서 자란 자식이 성장하여 이제 제 아픈 무릎 같은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있건만, 그 어머니의 관심은 마흔이 넘도록 이국을 떠도는 아우이다. 어머니에게 아우는 한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나의 무릎 같은 것. 어머니는 제 아픈 무릎을 돌보듯, 아우 걱정이시만, 나는 그런 어머니 깊은 속 마음을 알기에 밉기보다 더욱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엄원태 시인 /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고 앉은 아낙네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아낙네들의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들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엄원태 시인 / 노래

 

 

 그 여자는 그의 가슴에 있는 아득한 골짜기를 본다. 그녀는 그 깊은 상처에 제 몸 파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어지는 그의 아픔, 세상으로 난 길마다 외롭지 않은 곳 없다. 바라볼수록 깊어가는 그의 어둠, 세상의 기름 으로는 불 밝힐 수 없다. 가슴에 박힌 커다란 바위속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물은 메마르고 바람도 끊긴다. 여자는 이제 그의 가슴을 열고 햇살이 눈부신 바깥으로 나간다. 세상은 그저 찬란한  눈부심이다. 그녀는 곧 온몸이 더워지고, 흰이마는 밝게 빛난다. 여자는 노래 부른다. 한 아픔을 딛고 나와 세상에 부르는 노래는 그렇게 맑고 아름답다.

 

 


 

 

엄원태 시인 / 자전차포 김 사장

 

 

졸부가 된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천성이 껄렁했던 그는 읍의 종합고등학교를

다니다 말다 하며 시들시들 졸업한 뒤

소위 무위도식배로 청춘을 탕진하고는

늦장가를 들어 아이 둘 낳고 정신을 차릴 때쯤에

부친께서 짓던 논밭들이 구획정리 사업에 편입되면서

환지받은 상가부지에 보상비로 건물을 하나 올리고는

세를 놓아 먹으면서 무위도식의 팔자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는데

이 양반 놀고먹자에 팔자 좋은 몇 년을 보내니

사람들 그저 김씨 김가 부르는 호칭도 맘에 들지 않고

주색잡기에 난봉질도 한 청춘일 터

무엇보다 허구한 날을 심심해서 못 살겠는지라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드디어

가게 한쪽을 비워 자전차포를 차렸는데,

그리하여 자전차포 사장님, 김사장님이 되기는 되었는데

사장님이 된 기념으로다 자가용도 한 대 뽑고

명함도 새로 박고, 개업식도 요란뻑쩍 치렀는데

아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 것들은 자전거도 안 타는지

갖다놓은 자전거는 팔리지 않아 먼지만 쓰고

기껏 동네 아이들 빵구나 때워주고, 떨어진 페달이나 달아줄 뿐

그나마 요즘은 뜸해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니

우리 김사장님 무료함을 그 누가 달래줄꼬!

오늘도 우리 김사장님 런닝에 반바지 맨발에

안락의자에 앉아 부채를 든 채 낮잠으로 오후를 보내시는구나

그놈의 파리란 놈들이 우리 사장님 단잠을 방해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오늘도 그리하여 그럭저럭 가고 가는구나

 

 


 

 

엄원태 시인 / 꽃샘바람

 

 

꽃샘바람이 며칠 불고

나는 메말라 목이 마르다

이 며칠은 속절없이 아프다

 

그래도 이 한 몸

세상의 바람에 실린 것은

행운이었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야 깨닫는다

 

봄이 미처 오기 전에

이 며칠은 또 속절없이 앓게 될 것이다

 

철 이른 황사바람이

코끝에 차고 맵다

 

눈물어린 풍경을 건너

봄은 산너머 어딘가에 와있을 것이다.

 

 


 

엄원태 시인

1955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 1990년 《문학과 사회》 에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침엽수림에서』『소읍에 대한 보고』등이 있음.  1991년 제1회 대구시협상과 김달진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