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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방 시인 / 짝사랑
평생 한 사람만 사랑했네 하고 중얼거리자 세상의 온갖 새들이 웃고 지나가더군
뜨겁게 내려 쌓이던 지난날의 햇살들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먼지로 쌓인 별빛들 내 품 안에 잠시 안겼던 사람들과 마음에 잠시 나를 품었던 사람들이 교차로에서 서로 몰라보며 지나가고 오방색으로 알록달록 치장한 그림자들이 다시 연기가 되어 날아가버린 오후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싶었네 하고 내뱉자 이번엔 아무도 웃지 않았네
윤고방 시인 / 물방울 나라
하나에 하나씩 몸을 섞어도 억만 개가 어느 새 또 하나가 되는 단단하고 끈끈한 수평선의 나라 물방울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겠네
세상 구석 어디서나 우리는 외톨이지만 낮은 데로만 함께 흘러서 가장 높은 하늘에 닿는 돌아보라 세상은 넘치는 물소리뿐
죽어서 다시 죽어도 끝끝내 다시 돌아올 이 세월 이 땅 위에 오늘은 이름 없는 실개울도 분노의 소나기로 섰는데
가세, 눈물마저 마른 세상 웅덩이 한복판에 뿌리를 박고 뚝심 좋은 사랑으로 살겠네
윤고방 시인 / 겨울 주점에서
손끝에 맺히는 어둠을 따서 술을 담근다 토라진 옹이는 옹이대로 모아서 눈 시늉으로 우선 달래어 놓고 소갈머리 없는 알맹이도 하나 더 깊이 잠재웠다
따고 또 따도 열리는 어둠에야 이젠 눈 흘길 수도 없지만 바윗 벼랑 까치밥만큼이나 혼자 야물어진 껍데기를 어쩌면 녹일지도 몰라
뒷 고방에 과육 향내 터지는 날 발꿈치 팔꿈치 굳은 살 몇 점 여항간에 헤매다 돌아온 두꺼운 얼굴서껀 쉰 목청서껀 지글지글한 석쇠 위에 올려놓고 수액樹液 오르는 핏줄마다 달디달게 관솔불 당겨 청솔가지 옹이마다 화안히 취하는데 아무래도 손가락은 피멍진 어둠일 뿐 해 떨어지면 담그는 술을 동이마다 넘치는 어둠을 생살 터지는 오장육부에 두루 적시며 알맹이 울음 하나 들판에 깨어 있고 겨울도 노을을 따라 서쪽으로 가기 위하여 모두들 서쪽으로 간다
윤고방 시인 / 정육점이 보이는 길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빙하기의 허리 어디쯤에 덜미를 잡혀 있을까
정육점에 가 보면 사각의 유리벽 속에 구석구석 밖으로 통하는 길마다 틈새를 메운 성엣발과 살아 있는 살기殺氣로 형광은 붉게 타지만 참 신기하게도 편안히 정물靜物로 떠 있는 푸르붉은 살덩이가 보이지
더 가까이 다가서 보면 깨어 있는 꿈과 잠든 몸뚱이 사이를 용케도 발 가누고 섰는 우리들 이승의 별 하나도 보이지
꽃들의 낮은 비명을 딛고 열리는 아침에도 아직은 하늘에 별이 살아 있고 옷깃을 스치는 간빙기間氷期의 또 하룻날에 우리들의 살덩이는 고름과 진물과 한데 엉켜 웃으면서 쉬 쓸 듯 성엣발 속에 뒤를 묻고 껍질 질긴 씨 한 톨 뿌려야 하는데
누구나 생애에 꼭 한 번씩은 잊혀 완전히 돌아눕기 위하여 미명未明의 대지에 뿌리는 재 한 줌
가지고 떠나는 자들의 버리고 떠나는 자들의 어느 재 한 줌도 온전히 섞여 다시 불타서 허공 끝* 무극無極 밖으로 덜미를 풀어 던질 수 있을까
*동양철학에서 태극의 처음 상태. 우주의 근원.
윤고방 시인 / 어둠 환상곡 1
옛날 옛적 가슴 깊은 곳에 단단하고 예쁜 어둠 하나 묻어 두었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눈보라에도 고개 숙이지 않는 까맣게 빛나는 씨앗 한 톨 두꺼운 땅 속에서 움텄다 줄기에 잎이 무성해지는 날 꽃 한 송이 피어날 텐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일수록 땅 속 어둠이 고향인 줄을 눈 밝은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꽃 지고 맺히는 까만 씨앗 한 톨은 반드시 눈물 속에 묻어야 한다는 걸 눈 밝은 세상일수록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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