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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주 시인 /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황은주 시인 / 두부
두부를 먹네 창고에 앉아 두부를 먹다가 두부, 두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유희일까 참회일까 불빛을 닫으며 흰 두부가 쌓이고 부푸는
어둠을 모아 두부를 쌓네
두부라는 테라스가 있네 테라스를 경외하다가 테라스를 껴안네 테라스를 부숴 버리겠다고 말하면 광기 아니면 슬픔 테라스를 믿고 싶어 떨어지는 무차별한
흰빛을 모아 두부를 쌓네 두부라는 문을 두드리네 문을 두드리고 두드려서 시계를 만들고 공을 만들면 두부처럼 튕겨 오르는 하루와 두부라는 행성 목이 메는 건 거짓일까
어둑한 창고에 앉아 두부를 먹네 가장 낮은 곳의 두부를 골라 심장을 만드네 두부여, 나의 멀고 먼 침실을 찾아 띄워 줘
시집 『그 애가 울까봐』2019. 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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