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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혜정 시인 / 주유소
인간은 모험을 사랑한다 새것을 찾아가다 바닥난 기름통을 채우러 주유소로 흘러드는 자동차처럼 유리문 너머 미끄러져오는 한 남자를 본다 바쁘다는 표정으로 차 한 잔을 마시며 시계를 흘낏거리는 동안 기름때 밴 주유기를 꽃아넣고 텅 빈 눈으로 미터기를 응시하는 주유소 직원처럼 이 직업이 아름답다 생각하긴 너무 슬프다 저녁마다 사무원들이 북적이며 몰려나가 식사를 하고 돈과 친구와 쾌락을 찾아 떠도는 도심 한복판에서 그렇다 이건 너무나 외로운 직업이다 언제 집어치워도 미련도 없을 슬프고 냄새나는 일들을 어서 때려치우고 싶어 포켓북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있는 직원처럼 그렇게 날마다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창을 닦아내고 타이어를 손보고 연거푸 엔진오일을 채워주면 검은 매연을 얼굴에 내뿜으며 떠나는 그를 피로에 모지라진 입술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데 한 시인의 노트 위에 함부로 내팽개친 넥타이와 셔츠는 네 진보의 부산물이 아닌가 그렇다 세상, 나의 남편이여 너의 개인주의는 내 삶의 악몽이다 해를 넘길 때마다 시멘트 바닥보다 싸늘한 가슴으로 분노의 폐유는 응어리져가지만 시시한 브랜드 하나 없는 주유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오늘은 낡은 영화를 본다 좌절한 욕망의 아이들이 주유소를 부순다 테이프를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돌려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돌려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부수고 있다
200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허혜정 시인 / 불 먹는 사람
누런 공단청을 허리에 동여매고 하얼삔의 사내는 맨발로 서 있었다 어깨까지 흉터로 그을린 사내가 허공에 둥그렇게 불그림을 그린다
불꽃의 굴렁쇠가 스러져간 어둠 속 눈썹과 머리카락마저 밀어버린 사내가 호랑이같이 불을 삼켰다. 열도를 견디던 불룩한 불과 충혈된 눈빛
불꽃을 머금었던 임천장은 얼마나 오래도록 허물었던가 우울한 광기가 부서져 쌓일 때 까닭도 모를 불을 처음으로 삼켰던 순간 혓바닥과 기도까지 헐어버렸던 세월
신음했던 날들로 눈망울은 흐려도 이빨까지 검게 그을리도록 불붙은 화선지를 다시 내뿜고 타오르는 불바람을 안아들인다
바라보기조차 슬펐던 단단한 턱뼈 화상에 문드러진 광대뼈를 하고 재냄새가 번져가는 어두운 무대에서 마지막 손바닥의 불꽃을 거만하게 날려보낸다
월간 『현대시』2006년 5월호 발표
허혜정 시인 / 밤의 스탠드
이 아름다운 스탠드는 우리가 고른 것이다 작은 유리구슬을 당기기만 하면 부드러운 빛이 퍼진다 텅스텐 필라멘트처럼 위태롭게 깜빡이며 잠옷 위로 흐린 그늘을 만드는 빛 벽 위에 어슴프레 번져가는 그림자의 금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하긴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있는가 나날의 타협으로 쌓아올린 흐린 유리성 두 개의 상처를 이어 붙인 솔기처럼 하나의 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의 불빛 속으로 다가오는 피로한 얼굴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 이상한 슬픔이 몰려오고 갑자기 섬뜩하도록 차가운 정적 집이 텅 빌 때 느껴지는 그러한 정적 사랑. 누가 그 처음의 뜨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서서히 식어가며 함께 누워 있는 욕조처럼 편안해지는 것 그리고 창백한 타일 위에 고여 있는 물방울처럼 싸늘하게 말라가는 외로움 사랑을 끝내기는 힘든 일이다 어쨌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상한 그늘 아래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생활 그렇게 사실적인 그렇게 정확한 마시고 먹고 대화하는 식탁의 그 침대의 그 불빛의 그 외로움의 그늘 아래
허혜정 시인 / 테이프 자르는 이들
언제나 시대는 그들 손에 들려 있다 성황리에 열리는 개관식마다 가슴팍에 축하의 꽃송이를 달고 테이프 커팅을 하고 방명록에 사인을 하는 이들
즐비한 화환이 증명해주는 그들의 힘과 무비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기는 명성 그들은 유창한 연설을 하고 서둘러 기념식수를 하고 분주한 악수를 하고 떠났다
그들은 떠났다. 찹쌀떡을 팔러 온 노인과 배가 남산만한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웅웅대는 축사와 마이크 소리를 남겨두고 후원회의 박수를 받으며 한번 더 기억해달라며 떠났다
벌써 오래 전 그들은 떠나갔다 한 세기를 미끄러져간 릴테이프 신문지에 날리던 말들처럼 환한 풀밭에서 골프공을 날리며 리마로, 제네바로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멀리서도 환영처럼 머물러 있던 얼굴 언제나 출렁이는 피킷 속에 등장하던 정의의 전도사들 뉴스메이커들 참모진의 경호에 싸여서도 항상 곁에 있었노라 말하는 이들
만약 시간이 일분일초를 잘라내는 가위라면 지속되는 것만이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미터도 못 굴러가 진창 속에 처박힐 말들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는 그들
엄청난 기부자의 머리에 박사모를 얹어주는 대학처럼 액자를 기증하고 그럴싸한 명판을 새기는 이들 시립회관 복지회관 평화센터 명예의 전당에도 맘껏 공부하고 축하공연도 하라던 이들
그들은 떠났다. 뒤처리가 난감한 관리인과 우왕좌왕 흩어지는 군중을 남겨두고 다음 테이프를 자르러 떠났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처럼 그들은 떠났다 현관까지만 발도장을 찍고 갔다
미련한 들러리가 되어 날려주던 엄숙한 갈채 속에 늘 틀렸다고 느꼈다 아니라고 느꼈다 굳이 테이프 하나 자르러 먼 길 달려왔다는 이들 일찌감치 떠나는 게 당연한 이들 감사할 수밖에 없는 방문객들
― 웹진《문장》20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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