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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태숙 시인 / 민들레에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0.

함태숙 시인 / 민들레에게

 

 

저 사람은

왜 꽃을 보면서 꽃의 이후를 생각할까요

 

꽃은 관념이거나 체념이죠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독자적인

어떤 미지를

우린 꽃이라 하고 싶어요

 

땅속에 삼발이리를 박고

알코올 램프의 노란 심지를 올려요

 

타오르는 불꽃이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신체입니다

 

저 사람은 그걸 기다렸어요

알코올이 다 증발할 때까지를

 

그때부터 보이는 마음이 진짜죠

흩어지거나 또 다른 영토를 가져요

 

저 사람은 램프를 들고 있는 사람

저는 노랗게 그득 차오르고요

 

함태숙, 『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 , 시인동네, 2018, pp,16~17.

 

 


 

 

함태숙 시인 / 돼지머리 집 앞에서 전생을 보다

 

 

어쩌면 삼천대천세계 나아갈 적에

펄펄 끓는 물에 몸 삶기우는 것도

업장 녹일 큰 벌을 받듯

새끼 발길질로 묵직하던 아랫배와

헐릴 듯 물리던 젖꼭지와

핏물 배인 겹겹의 살점들

봉다리 봉다리 들려 보내고

다만 한 미소를 깨우친

돼지머리, 저 불두

지장경 지장경

솥물 끓는 소리를 내며 꿈꿨을 것이다

 

아이를 업고 안고 걸리고

저잣거리를 지나는

이 아름다운 내세를

 

 


 

 

함태숙 시인 / 명주동

 

 

  물 깊은 어둠 속에

  눈썹처럼 잠긴 집

  창 밖에 꽃송이

  환해오면

  멸치떼 처럼 가두키던

  환몽 같은 집

  떠나와도 이 깊은 바다

  몸에서 떨군 비늘로

  섬을 세웠다

  몇 생의 몇 갑절로

  눈도 못 뜬 치어들이

  물 위에

  저의 본적을 밝힌다

  갖혀 죽고 싶은

  성긴 그물망에

 

* 시집, 새들은 장천에서 죽는다. 에서

 

 


 

 

함태숙 시인 / 재만

 

 

사람이 죽으면 사물 속으로 들어가 손끝에서 달그락 거리고 문지방을 삐걱 거리며

그 날의 습기와 우울을 묻혀 낡고 처연해 지는 시간의 부식

 

계속 죽고 있다는 것은 계속 돌아오는 것이 있었다는 거지

 

이마에서 자라난 소나무를 베어내고 푸른 무덤을 빠져나와 죽음이 네게로 가는 길을지웠지 그리고, 우리 안에 너는 있어 햇살을 받을 때 속에서 피어나는 것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

 

사는 게 뭐야?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사물들은 부스럭 거리고

 

오빠, 너는 죽음의 귀 하나를 떼어 주었어

 

 


 

 

함태숙 시인 / 원통보전 꽃피시다

 

 

  천년 간 묵언수행 끝

  좌탈입망(坐脫立亡)

  물이란 말라 바람이 된다는 것

  꽃이란 썩어 불이 된다는 것

  낙산사 원통보전 한 소식 하시네

  바람 타고 불을 타고

  닫집 아래 부처님 내원궁이 타네

  영산당시 오백 아라한이 타네

  도솔천이 무간지옥이 타네

  허공에서 나온 혀가

  제 몸을 모두 집어 삼키니

  비로소 적멸이네

  전소하지 않았다면 드러나지도 않았을

  저기 대여(大如)

  바람에 밀려 물관이 서고

  불을 삼켜 열이 오르니

  다비를 마치고 문득

  저 꽃을 뭐라 부를까

  목련가지 끝, 흰 잿더미

  단청 없는 전각 한 채를

 

 


 

함태숙 시인

1969년 강릉에서 출생. 중앙대 심리학과, 同 대학원 임상심리학 전공.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한국문연, 2017)와  『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시인동네, 2018)가 있음. 2019년 서울시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