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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 시인 / 나의 갠지스, 천수만
겨울 철새의 새오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천수만 상펄은 조금 사리가 뒤바뀌는, 달이 태어난 바다의 배꼽이다. 라텍스 피부를 가진 바닷물이 양수처럼 가득 차오르는
천수만은 원래 초승달에 생일로 태어났지만 천 개의 연꽃잎을 어둠에 감추고 매일 밤 한 장씩만 떼어서 유백색 둥근 얼굴로 바다의 장지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장대 키를 훌쩍 넘긴 달빛이 머리를 산발하고 옆구리에 물 항아리를 둘러멨다. 항아리에서 연신 국자로 물을 퍼 수량을 조절하며 부드러운 입김으로 바람을 불러 체에 모래를 곱게 거른다
비옥한 여신의 보름사리. 주름 잡힌 달의 옆구리에 밀물 들면 바다는 살과 살이 맞닿은 강줄기의 안주머니 깊숙이 가죽 지갑 속에 외씨를 심듯 패류(貝類)의 꿈을 꼭꼭 숨겨 둔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은밀한 밤에 섬들이 토한 잠 덜 깬 모시조개의 탯줄을 받아 내며
밤마다 천수만에 뜨는 바르한의 초승달은 별과 바람과 노을을 통해 모든 생명을 제각각 길러 낸다. 그중 세 번째 통로인 상현달은 하늘의 미간에 위치해 있기에 생각이 너무 무거워 차라리 눈을 감고 있다가, 결국 밝은 해를 보지 못하고 섬이 만든 캄캄한 그리움 속에서 바다의 음성을 겨우 매만지다 어둠의 동공에 투신했다
두 갈래의 길로 빛이 새어 나와 다시 불꽃을 만들어 낸다. 놋쇠로 만든 폭풍의 삼지창을 미풍에 삭힌 다음 남게 되는 그날그날의 불 꺼진 재는 바다의 지붕 위에 낙조로 흩뿌려져 주꾸미와 새조개를 기른 양막에 오래 유등으로 흘러 부활한다. 철새 울음이 쌍발 썰매를 끌고 온 겨울, 찾아온 새들이 하늘이 내준 빈 관절 하나를 입에 물 때 석화는 혹한을 털모자로 짜 머리에 쓰고 살을 채운다. 이때 바다에 가득 찬 달빛은 눈발이 날아와 앉았던 느린 염기를 활활 태워 우둔한 결빙을 온몸으로 버티며 건너가고
햇살이 내려앉는 대낮엔 집게발을 높이 쳐든 황발이가 앞마당 갯벌 가득 떼를 이루어 양귀비 꽃밭을 일군다. 붉은 만다라를 게들이 연신 비눗방울처럼 퐁퐁 게워 내며 경건하게 강심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순간, 붉은 구름은 반들반들한 썰물을 하루 종일 멍석처럼 말고 갔다 다시 가볍게 밖으로 펼치고 나온다
천수만엔 낮과 밤을 지피는 파도의 키에 맞춰 무려 삼억 삼천의 달빛이 퍼뜨린 물고기들이 이웃하며 산다. 밤마다 그들은 마른 나문재 가지로 어둠을 먹물로 찍어 풍요를 비는 색색의 타르초를 상형문자로 새긴 다음, 해 질 녘 가창오리 떼의 길게 목 뺀 울음소리에 마지막 햇살을 얹어 광목천으로 펼치는 것이다
*상펄: 서해 천수만 한복판에 있는 모래땅. 물이 따뜻하고 모래가 얕아 물고기들이 산란하러 모여드는 장소.
하재일 시인 / 우럭젓국
도라지를 찹쌀고추장에 찍어 몇 잔 사발을 들이키니 도라지 냄새가 간밤을 지나 새벽까지 왔다. 닭 울음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나는 산속에 외따로 떨어져 피어 있는 한 송이 도라지꽃! 이럴 때면 으레 바닷가 고향 마을에서 먹던 간간한 우럭젓국이 생각났다.
우선 곱게 소금을 친 후 한 사나흘 동안 꾸들꾸들 그늘에 말린 우럭 포에 뽀얀 쌀뜨물을 붓고 두부와 청양고추 다진 마늘을 넣고 푹 끓이기만 하면. 이때 새우젓으로 간을 맞춰서 맑은 탕으로 솜씨를 부리지 않아도 우럭 안에 숨은 마른 햇볕을 잘 꺼내기만 하면 그만인데.
깊은 바닷속 그 맛의 진국이 펼쳐진 검은 늪에 노랑부리저어새처럼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시원하면서도 뒤끝이 개운한 맛인, 억센 우럭 뼈가 내뱉은 해탈의 맛이 새벽 꽃밭에서 서늘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비리지 않은 목소리로 허공에 담백하게 외칠까. 진미 났다!
*진미 났다: 독살에서 우럭이 많이 잡히면 ‘진미 났다!’ ‘꽃이 났다!’고 외치면서, 동네 사람들과 잡은 물고기를 나눠 먹던 풍습이 오래전부터 서해 바닷가에 있었다. 충남 태안 지방 방언.
하재일 시인 / 달마의 눈꺼풀
지금 풀잎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대나무 지팡이 같은 거 땅에 꽂아 놓고 근사한 당나귀 타고 여인숙 앞을 지나간 눈먼 건달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무쇠 가마솥에서 미인의 속눈썹이 나왔다고, 박박 우기는 거죠
당신께선 붉은 수염을 구하려고 이 밤중에 서역으로 급히 떠나신다고요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신던 미투리를 방문 앞 문고리에 척 걸어 놓는다고 어둠을 밝힐 불밝이쌀이라도 생기나요? 거기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가지가 뻗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향기를 천하에 풍긴다고, 세상이 달라질까요?
쇠약하신 아버지께선 큰집엔 왜 가셨죠 대뜸 냉대를 당하자 굽은 허리를 막대에 의지한 채 길바닥에 쓰러져 돌아가신 후 그 자리에서 푸른 나뭇잎이 돋아났다고요, 영혼을 위로하는 풀잎 한 잎이 내 심장에서 자랄 수 있을까요
버드나무 지팡이를 삼거리 입구에 세웠다고요 나무에 움이 트면 너를 데리러 오마, 하고 달랜 뒤 새처럼 홀연히 길을 지우고 멀리 떠나셨다고요 그렇게 스쳐 간 늑골을 기다리는 풀잎도 있을까요
당신이 대뜸 꽂아 놓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이제 풀잎이 돋고 그림자가 우거져 제법 초록이 속으로 까매졌습니까? 그것만이 사람들이 바라던 기적이었을까요
끝없이 영생을 꿈꾸는 주문(呪文)에 시달렸고 몽상에 잠겨 날마다 단잠을 설쳤나요 인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장하기만 합니다 잔에 풀잎 몇 장 띄워 놓고 복면 쓴 사내들이 모여서 중얼중얼, 그래서 무얼 어쩌자는 겁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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