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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문순 시인 / 파문과 파장
남자가 앉은 자리에 내가 다시 앉는다 등받이를 의지했던 짙은 졸음 남았다가 재빨리 내 몸쪽으로 뜨끈하게 달라붙는다
이동한 것은 느슨한 온도만이 아니다 의자와 긴밀했던 엉덩이의 낯선 체위가 버스의 움직임 따라 내 것에 맞춰진다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으로 건너가는 한 세계의 온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모든 걸 품은 것들은 파문이 아주 깊다
표문순 시인 / 꽃점
앙상한 가지 속에 숨은 비의(悲意) 읽어내니 전생은 두 송이의 꽃으로 요약된다 처음은 주인공이나 중간부턴 엑스트라
한쪽엔 어미의 탄식 말없이 솟아 있고 다른 쪽엔 아비의 파란 폐허로 웅크렸다 누가 더 꽃의 중심에 닿아 있는 상태인가
예언이 흩날리던 지점에서 길 잃을 때 불안의 방향으로 의문들이 귀를 연다 운명의 진원지 같은 향기와 마주하고
일평생 사납기만 한 운수를 생각한다 고아의 뒤란에서 점멸 중인 꽃잎 따며 마지막 한 닢에 물린 괘(卦)들을 감정한다
- 웹진 "공시사" 2017년 3월호
표문순 시인 / 붉은 목장갑
어쩌면 나이기도 너이기도 했었을, 약간은 물컹거렸던 바퀴의 감각으로 오늘은 바닥만 붉은 목장갑을 목격했다
늘어진 혓바닥에 겨우 달린 숨결처럼 바퀴에 붙어 있는 들짐승의 잔털처럼 야생에 올이 풀린채 도로를 뒹굴었다
한 그릇 밥 되는 일, 목 놓고 버티는 거라고 하루씩 이어가는 너절한 일당 앞에 눈발은 대책도 없이 다독다독 덮고 있다
표문순 시인 / 줄기의 감정
좌표를 잃어버린 철도변 넝쿨들이 사선蛇線에 목을 놓고 있는 힘껏 건너간다 천천히 아주 묵묵히 햇볕을 끌고 간다
덫이 된 듯 요동 없는 단단한 침목들은 왁자했던 열차의 흔들림을 함구한 채 조용히 7월로 이동하는 덩굴손을 지켜본다
노래처럼 덜컹대며 달려올 불안들 이 침묵에는 읽어야할 슬픔이 너무 많다 한 뼘씩 영역을 뻗는 감정을 읽는다
표문순 시인 / 4호선
전단지 뿌러놓듯 강제로 얹어 놓은 반절짜리 결함을 무플에서 발견한다
읽어도 읽지 못하는 마음의 난독증을
소량의 적선과 다량의 무관심 사이 온종일 휘인 말이 앉았다가 스러질 뿐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눈을 닫는 사람들
<<공복의 구성>> 표문순, 2019 고요아침
표문순 시인 / 공복의 구성
부재를 포옹했던 여벌같은 그릇들이 발단의 정점 향해 슬그머니 일어서면 결핍에 감염되었던 냉장고가 앓는다
가족과 식구의 차이 이별과 별리 차이 목안木雁의 사슬을 맨 무거운 날갯죽지 전개된 공복의 범위 알수록 넓어진다
냉장실에 쌓여있는 먹다 남긴 시간들이 위기의 한 가운데서 부패를 시작하면 그 모든 칸칸 속에서 불면을 증식한다
자정의 위장 속엔 거대한 혼잣말 있다 날마다 문을 열지만 불구의 배를 채울 1인칭 서사 구조는 매끼 마다 절정이다
목안木雁: 나무 기러기.
표문순 시인 / 부부의 세계
울 엄마가 잘하는 건 동동주 담그는 일 주정꾼 아버지를 근근이 견디면서도 철마다 몸에 좋다는 약술을 짓곤 했다
아랫목 이불 밑에서 하얗게 일고 있는 술밥의 새코롬한 냄새가 진동하면 우리는 뒷마당에 필 눈물꽃을 걱정했다
늴리리 한량 같던 25º짜리 아버지, 네 엄나 네 엄마 하며 늘푸른 요양원을 날마다 넘어오시는 그 사람도 아버지
- 《시조미학》 202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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