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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표문순 시인 / 파문과 파장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0.

표문순 시인 / 파문과 파장

 

 

남자가 앉은 자리에 내가 다시 앉는다

등받이를 의지했던 짙은 졸음 남았다가

재빨리 내 몸쪽으로 뜨끈하게 달라붙는다

 

이동한 것은 느슨한 온도만이 아니다

의자와 긴밀했던 엉덩이의 낯선 체위가

버스의 움직임 따라 내 것에 맞춰진다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으로 건너가는

한 세계의 온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모든 걸 품은 것들은 파문이 아주 깊다

 

 


 

 

표문순 시인 / 꽃점

 

 

  앙상한 가지 속에 숨은 비의(悲意) 읽어내니

  전생은 두 송이의 꽃으로 요약된다

  처음은 주인공이나 중간부턴 엑스트라

 

  한쪽엔 어미의 탄식 말없이 솟아 있고

  다른 쪽엔 아비의 파란 폐허로 웅크렸다

  누가 더 꽃의 중심에 닿아 있는 상태인가

 

  예언이 흩날리던 지점에서 길 잃을 때

  불안의 방향으로 의문들이 귀를 연다

  운명의 진원지 같은 향기와 마주하고

 

  일평생 사납기만 한 운수를 생각한다

  고아의 뒤란에서 점멸 중인 꽃잎 따며

  마지막 한 닢에 물린 괘(卦)들을 감정한다

 

-  웹진 "공시사" 2017년 3월호

 

 


 

 

표문순 시인 / 붉은 목장갑

 

 

어쩌면 나이기도 너이기도 했었을,

약간은 물컹거렸던 바퀴의 감각으로

오늘은 바닥만 붉은 목장갑을 목격했다

 

늘어진 혓바닥에 겨우 달린 숨결처럼

바퀴에 붙어 있는 들짐승의 잔털처럼

야생에 올이 풀린채 도로를 뒹굴었다

 

한 그릇 밥 되는 일, 목 놓고 버티는 거라고

하루씩 이어가는 너절한 일당 앞에

눈발은 대책도 없이 다독다독 덮고 있다

 

 


 

 

표문순 시인 / 줄기의 감정

 

 

좌표를 잃어버린 철도변 넝쿨들이

사선蛇線에 목을 놓고 있는 힘껏 건너간다

천천히 아주 묵묵히

햇볕을 끌고 간다

 

덫이 된 듯 요동 없는 단단한 침목들은

왁자했던 열차의 흔들림을 함구한 채

조용히 7월로 이동하는

덩굴손을 지켜본다

 

노래처럼 덜컹대며 달려올 불안들

이 침묵에는 읽어야할 슬픔이 너무 많다

한 뼘씩 영역을 뻗는

감정을 읽는다

 

 


 

 

표문순 시인 / 4호선

 

 

전단지 뿌러놓듯

강제로 얹어 놓은

반절짜리 결함을 무플에서 발견한다

 

읽어도 읽지 못하는 마음의 난독증을

 

소량의 적선과

다량의 무관심 사이

온종일 휘인 말이 앉았다가 스러질 뿐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눈을 닫는 사람들

 

<<공복의 구성>>  표문순, 2019 고요아침

 

 


 

 

표문순 시인 / 공복의 구성

 

 

부재를 포옹했던 여벌같은 그릇들이

발단의 정점 향해 슬그머니 일어서면

결핍에 감염되었던 냉장고가 앓는다

 

가족과 식구의 차이 이별과 별리 차이

목안木雁의 사슬을 맨 무거운 날갯죽지

전개된 공복의 범위 알수록 넓어진다

 

냉장실에 쌓여있는 먹다 남긴 시간들이

위기의 한 가운데서 부패를 시작하면

그 모든 칸칸 속에서 불면을 증식한다

 

자정의 위장 속엔 거대한 혼잣말 있다

날마다 문을 열지만 불구의 배를 채울

1인칭 서사 구조는 매끼 마다 절정이다

 

목안木雁: 나무 기러기.

 

 


 

 

표문순 시인 / 부부의 세계

 

 

울 엄마가 잘하는 건 동동주 담그는 일

주정꾼 아버지를 근근이 견디면서도

철마다 몸에 좋다는 약술을 짓곤 했다

 

아랫목 이불 밑에서 하얗게 일고 있는

술밥의 새코롬한 냄새가 진동하면

우리는 뒷마당에 필 눈물꽃을 걱정했다

 

늴리리 한량 같던 25º짜리 아버지,

네 엄나 네 엄마 하며 늘푸른 요양원을

날마다 넘어오시는 그 사람도 아버지

 

- 《시조미학》 2021. 봄호

 

 


 

표문순 시인

2014년 《시조시학》으로 등단. 한양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