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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혜정 시인 / 숲속의 파일 -산남동에서
그것은 봄날에 들었던 아이의 노래니 봄풀 우거진 매봉산 어귀에서 아이는 유치원가방을 던져두고 쪼그리고 앉았다 나뭇잎을 양산마냥 받쳐 들고 천 년 전의 일을 하는 흙 개미들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양이 비껴드는 소나무 곁엔 아이가 모아놓은 마노돌이 반짝거린다 푸른 힘이 고여 가는 나무밑동과 노을에 물들어 황금가지가 된 강아지풀들 아이의 머리 위로 해넘이의 하늘은 펼쳐져 있다 여기 위대한 눈빛을 가진 작은 사람이 있어 아 문득 사랑으로 올려다보는 하늘 두유 몇 모금 삼키다 말고 방랑하는 종족처럼 아이는 떠돈다 신비가 바스락이는 숲을 조건 없이 누린다 헛된 질문 없이도 모든 해답을 누린다 내려가는 길, 흙을 밟고 내려가는 길 봄에는 한배 가득 알을 품은 언치 새를 보았다 빌 찌르르 듣고 싶은 대로 들리는 새 울음처럼 아이의 가느다란 허밍을 듣고 있던 것이니
허혜정 시인 / 말벗
분명 눈매가 날카롭던 그인데 피식 웃음을 날리는 그 처음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맑은 저수지가 내다보이는 실업자의 집 황태랑 막걸리를 먹었다 세상만사가 좀 허무해졌다면서도 단련된 펜은 지방신문 생활칼럼을 쓰고 있다 텃세 심한 세상 눈 밖에 난 돌멩이처럼 어차피 혼자여야 하는 생의 독방으로 돌아온 그는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를 읽고 있다 중세의 어둠은 지금도 지속되는 것인지 부대끼던 아픔 상처투성이 대화도 없이 시골 방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우리는 빛바랜 대학시절 글을 읽는다 어허 좋다, 좋지 이 말 벙벙하게 웃으며 넓고 큰 발로 세상을 짚고 선 산을 보았다 삶이 대단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달디 단 말은 거짓말이 되니까 싫었다 세상 끝에서 시간의 폐허를 지키던 착한 백치는 침묵한 게 아니다. 이름을 고집하는 생을 거부했을 뿐
허혜정 시인 / 나무는 젊은 여자
1 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차갑게 젖어 있는 잎새와 진흙 묻은 뿌리들 아무런 봉오리도 돋아오르지 않은 회색빛 정경 속에
저 나무는 젊은 여자처럼 서 있다. 자신을 폭발시키기를 기다리는 폭탄처럼 동심원의 빗장을 가슴에 단단히 지르고
너는 뿌리요 하늘을 향해 손 뻗친 가지요 무모한 갈망을 잡아당기면서 널 키우는 힘이요. 스스로의 발부리를 잡고 있는 족쇄요 분수를 꿈꾸는 수도꼭지요
그래, 침묵하는 동안에도 우린 노래부르고 있지. 때가 되면 세포가 갈라지지. 더 빨리빨리 쪼개지지 천 개의 눈알을 폭발시키지
내 세포들은 성난 폭도 공기와 빛의 부드러운 약탈을 나는 꿈꾸고 있다 폭음도 없이 비릿한 선혈을 토해 내는 저 아름다운 폭탄처럼
2 싱싱한 활엽수처럼 잔뜩 햇빛을 받고 커오르길 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키 작은 침엽수였으면 한다. 울음이 상처로 찢겨 버린 잎사귀. 바람과 싸우면서 그늘 속에서 자라는 나무
식민지의 군대처럼 완강히 제자리를 사수하는 나무 힘찬 아리아를 연습하는 가수처럼 중얼대며 더 바짝 마른 산등성이에 누워 있는
그러나 힘차게 허리를 튕겨올리면 얼마나 미끈하게 자랐는지 아무도 모르지 비틀비틀 변두리로 유배되어 가면서도 끝내 질긴 섬유질의 근성을 포기하지 않는 나무
이왕이면 자리를 깔고 앉는 공원이 아니라 아찔하도록 위태로운 절벽에 뿌리박고 싶다 물론 그 밑에는 내 발가락까지 깨끗이 염습해 줄 바다가 쓰리도록 차갑게 출렁이고 있어야겠지
-2000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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